▲ 박애란 변호사(법조공익모임 나우)

대상판결 : 서울행정법원 2018. 11. 29. 선고 2017구단75661 판결


1. 사건의 개요

원고는 만 18세 나이에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 입사해 7년간 근무하다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 왼쪽 결장 반절제술 후 상태’ 진단을 받은 후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원고 근무환경에 대한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 산화에틸렌 및 기타 발암성 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추정돼 업무관련성이 부정된다는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전문가 소견을 근거로, 원고의 요양급여 신청에 대한 불승인 처분을 했다. 원고는 이에 불복해 요양불승인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2. 판결의 요지

(1) 가공공정 생산라인 수시 출입, 상당 기간 체류시 벤젠 등 노출 가능성 긍정법원은 원고가 식각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암물질인 산화에틸렌·아세톤·이소프로필알코올·황산·과산화수소 등에, 또한 근무하는 내내 웨이퍼를 수거하기 위해 제대로 보호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로 웨이퍼 가공공정 등에 수시 출입하고 상당시간 체류하면서 그 공정에서 발생했을 벤젠·포름알데히드·전리방사선 등에 장시간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봤다.

(2) 작업환경측정 제도의 한계 지적

법원은 일정한 시기에 각 공정, 작업장소별로 1회 측정하는 방식은 실제 작업환경의 측정 결과로서 한계가 있으며 유해인자 노출기준은 해당 유해인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데 유해인자 복합 노출, 장시간 근무 등 작업환경의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유해성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고, 노출수준 이하라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에는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3) 업무상질병의 범위 확장

법원은 이 사건 상병 중 ‘왼쪽 결장 반절제술 후 상태’는 원고의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이 역시 업무상질병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봤다.

(4) 산보연의 역학조사 잘못 지적

법원은 원고가 웨이퍼를 수거하기 위해 수시로 웨이퍼 가공공정 등에 출입하거나 체류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산보연은 그중 식각 작업에 사용된 화학물질과 다른 공정의 식각 작업환경에 집중해 역학조사를 했을 뿐이고, 벤젠 등 발암물질의 노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웨이퍼 가공공정 등에 대한 직업 환경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5)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발병률이 높은 점을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

법원은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발병률이 우리나라 전체 평균 발병률이나 원고와 유사한 연령대의 평균 발병률과 비교해 유달리 높다면(산보연의 2017년 최신 후향적 코호트연구 결과 반도체산업에 종사하는 여성근로자가 대조군에 비해 백혈병의 표준화발생비가 2.57배로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사정 역시 원고의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에 유리한 사정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3. 이 사건의 의미

통상 반도체산업 근로자의 산재소송은 ‘현대의학의 한계’라는 기본적인 장벽 외에도 사업장의 고의적인 업무환경 자료 폐기 혹은 은폐, 산보연의 부실한 역학조사 등으로 난관에 부딪히기 일쑤다. 따라서 대상판결이 작업환경측정 제도의 한계를 밝히면서 측정 결과 이상의 유해화학물질 노출을 긍정하고, 산보연 역학조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결과를 배척했으며,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발병률이 높은 점 등을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해 원고의 산업재해를 인정한 것은 의미가 크다.

작업환경측정은 측정 대상 물질의 제한성, 측정 방법의 제한성, 측정 시간의 제한성, 평가 시기의 제한성, 직무 비분류 등을 이유로 반도체산업 유해인자 노출위험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대상판결은 이러한 작업환경측정 결과의 한계를 판결문에서 설시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향후 작업환경 측정시 측정기관과 사업주 담합 가능성 차단, 측정 결과 보고체계 개선, 근로자의 참여 및 알권리 강화, 측정기간과 주기 개선 등도 하루속히 이뤄져야 한다.

산보연이 행하는 재해근로자 역학조사는 전문적으로 이뤄지는 매우 중요한 절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인과관계 판단이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지 않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업주가 제출하는 자료에 의존해 형식적이고 부실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매우 부실하게 이뤄졌고, 대상판결은 이를 상세히 지적하고 있다. 역학조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고 해도 산보연은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렇게 부실하게 이뤄진 역학조사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산재 사건의 업무관련성 증명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대상판결은 향후 산재사건에서 역학조사가 더욱 충실하고 실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대상판결은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 관리자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던 판결(서울행정법원 2017. 11. 17. 선고 2015구합70225 판결)처럼 반도체 생산라인 가공공정 직접 담당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해당 라인에 수시 출입, 상당기간 체류시 벤젠 등에 노출될 가능성을 긍정했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인과관계를 적극적·규범적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한편 “이 사건 상병 중 ‘왼쪽 결장 반절제술 후 상태’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인한 상병으로 치료방법 부작용으로 인해 새로운 상병이 발생했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원고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이 역시 업무상질병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는 판결문 설시 부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사업장 근로자가 법원에서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받게 되면, 상병 승인 후 추가 상병을 별도로 신청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처음으로 판결문에서 상병 자체를 넓게 인정하면서 이를 밝혀 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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