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젠더갑질 실태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에서 박선영 중앙대 HK+접경인문학 연구단 연구교수가 발표하고 있다.<정기훈 기자>

1960년대 미국에서 달탐사선을 쏘아 올릴 당시 나사(NASA)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 수학자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 여자 주인공 캐서린이 핵심사업부로 승진한 후 겪는 차별이 그려진다. 대표적인 게 흑인용(Colored) 화장실을 가기 위해 주차장을 지나 다른 건물까지 족히 30분을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런 식의 차별행위가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KT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던 여성노동자 A씨. 모뎀을 회수하다 보면 땀으로 샤워를 한다. 하지만 A씨는 땀냄새에 절어 퇴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회사에 여성 샤워실이 없기 때문이다. A씨가 수차례 항의하자 회사측은 인근 대중목욕탕 이용쿠폰을 주는 것으로 무마했다. 그러나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없었다. 남성 직원들은 회사에서 샤워한 후 오후 6시에 퇴근하는데, 여성 직원들은 퇴근 후에 목욕탕을 이용해야 하는 탓이다.

일터에서 여성들이 겪는 갑질, 이른바 '젠더갑질' 사례가 1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공개됐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과 여성노동자회 등이 구성한 '젠더갑질실태조사팀'이 토론회를 주최했다.

조사팀은 ‘젠더갑질’을 입사·임금·승진·업무수행 전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과 성적 괴롭힘으로 규정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KT 본사와 SK브로드밴드, 케이블방송 딜라이브, 수도권 교육공무직,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282명을 대상으로 지난 9월15일∼10월12일 온·오프라인에서 실시한 ‘젠더갑질’ 실태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여성노동자들이 꼽은 구직시 가장 큰 어려움은 나이 많은 여성을 채용하는 회사가 없다(29.1%)는 것이다. 여성을 적게 뽑거나 안 뽑는다(24.1%)는 응답이 두 번째로 많았다. 여성 2명 중 1명이 단지 성별 때문에 구직에서부터 차별을 경험하는 셈이다. 면접에서는 결혼 여부와 연인 유무, 나이와 거주형태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입사 당시 들었던 질문 1위는 "결혼했냐"(46.5%)였고, 2위는 "남자친구 있냐"(16.0%)였다. 공동 3위는 "혼자 사냐"와 "(나이와 관련해) 여태껏 뭐했냐"(각 15.2%)가 차지했다.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질문에는 197명(69.9%)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197명을 대상으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 물었더니 "성적 모욕감을 유발하는 말을 들었다"는 답변이 34.0%로 가장 많았다. 불필요한 사생활에 관한 질문(25.9%)이나 회식 때 상사 옆에 앉게 하는 행위(21.6%)가 뒤를 이었다. 조사팀은 "젠더갑질은 특정 사업장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라며 "자본의 논리와 가부장제가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성차별적 노동구조가 직장내 젠더갑질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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