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서울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는 구의역 김군의 사망사고를 계기로 외주업체 노동자 1천285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직영화하고, 지난 3월에는 일반직과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일정한 유예요건을 붙여 무기계약직을 일반직으로 통합하는 실질적인 정규직화를 단행했다. 그러자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서울교통공사 정규직원 중 400명과 교통공사 공채지원자 중 탈락자 114명이 “채용절차가 간단한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달 22일 서울행정법원은 “서울교통공사가 행정소송 대상이 되는 행정청에 해당하지 않고 교통공사 근무관계는 공법이 아닌 사법관계에 속하며, 정규직이나 수험생의 경우 침해될 이익이 있다 해도 간접적인 이익에 불과하다”는 등의 이유로 소송을 각하했다. 소 제기 당시 원고로 참여했던 당사자들은 비정규직이 시험으로 선발돼야 할 양질의 청년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공격했다. 지난 10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등은 외주업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막장 고용세습, 채용비리 게이트, 청년일자리 약탈이라고 선동했다. 그리고 다수 의석을 이용해 기어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 국정조사를 관철시켰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화 반대 목소리는 비단 서울교통공사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기간제 교사들의 정규직화를 반대해 임용고시 준비생들이 시청광장에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각종 공기업 내지 공공기관의 정규직화에 대해 일부 정규직과 취업준비생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이들의 주장은 시험에 합격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잠 안 자고 공부해 합격한 정규직과 동일한 처우를 받는 것은 역차별로 부당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일자리에 무임승차함으로써 균등한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정성을 상실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분개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시험성적만이 가장 공정한 기준이 되는 시험만능주의 사회가 돼 버렸다. 서류로 치르는 평가시험 점수를 우리는 ‘실력’이라고 부른다. 성적은 자신의 능력으로 치환되고, 성적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물론 이마저도 권력과 자본 앞에서는 무력하다.) 성적 상위자는 기회를 누리나 경쟁에서 탈락한 자는 낙오자로 전락하고 차별과 배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그 시험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어떠한 실무능력을 갖춰도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속한 직군에 포함되거나 이들과 동등한 처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기회의 균등과 정당한 노력, 실력에 대한 온전한 보상”을 주장하는 것이 무어 잘못됐냐고 말이다. 정말 기회가 균등했던 것일까? 벤츠 타고 최고급 과외를 받으러 다니던 부잣집 학생과 아르바이트 두 탕을 뛰어야 겨우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는 가난한 학생 사이에 기회의 균등이 가당키나 할까? 부모도 능력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정당한 노력은 왜 종이시험으로만 평가돼야 하는 것일까? 스크린도어 수리업무에 필요한 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숙련과 경험을 쌓았다면 그 자체로 평가돼서는 안 되는 것일까? 과연 실력으로 포장된 성적 서열화 사회가 행복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사회가 정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만이 사회적 대우를 받고 존엄성을 인정받는 체제를 ‘능력급부 존엄체제’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체제는 서열화로 인해 무한경쟁 승자독식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이런 사회는 획일적인 기준을 근거로 더불어 살자는 공동체 가치를 허물고 사회적 약자를 박멸해 가는 사회다. 실력이라는 이유로 강자가 약자를 공격해도 도덕적인 가책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는 사회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자유가 평등을 버리고 달리는 체제, 평등이 거세된 사회다. 돈과 권력이 능력으로 칭송받고 서열과 시장의 자유만이 존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단면이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라. “하늘나라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그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주인이 오전 9시쯤에 다시 시장에 나갔다가 거기서 빈둥거리며 서 있는 몇몇의 사람들을 봤다.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포도밭에 가서 일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그러자 그들은 포도밭으로 갔다. 이 사람이 다시 낮 12시와 오후 3시쯤에 나갔다. 그리고 똑같이 말했다. 또 오후 5시쯤에도 시장에 나가 또 다른 사람들이 거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서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나의 포도밭에 가시오.’ 저녁이 되자, 포도밭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맨 처음에 왔던 사람까지 품삯을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맨 처음에 고용됐던 일꾼들이 왔다. 그들은 더 많은 품삯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포도밭 주인에게 불평했다. ‘저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취급하는군요.’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말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당신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약속하지 않았소? 당신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나중 사람에게도 당신과 똑같이 주고 싶소.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그러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이처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란 노동을 서열화해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다. 획일적인 기준을 들이대며 그 기준 이외에는 공정하지 않다고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껏 최선을 다했다면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잘난 노동’이 ‘못난 노동’을 공격하는 선동은 멈춰야 한다. 거꾸로 차별 없는 일자리를 만들라고 같이 외쳐야 한다. 연대란 약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을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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