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한 지 1년6개월여가 지났을 뿐인데도 자회사 전환이 대세가 돼 논란을 일으킨 간접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뿐만 아니라 기간제 노동자 정규직화마저 도처에서 좌초되고 있다.

“저는 서울대에서 지난 30여년 동안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이 기관 저 기관을 옮겨 다니면서 매번 새로이 근로계약을 맺어 왔습니다. 학교측에서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댔지만 이것은 결국 무기직으로 전환해 주지 않으려고 쓰는 편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기관들 입장에서는 숙련된 사람을 예산상 큰 부담 없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당사자인 저는 그동안 얼마나 큰 불안감에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왔는지 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며, 그 부당함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각각의 기관들은 각자의 입장에서만 관계를 바라보고 정당하게 저를 고용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동안 서울대학교라는 거대한 기관이 약자인 개인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리다가 이제 내보내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S씨가 서울대 대학본부 인사 책임자에게 이메일로 보낸 글 내용 중에서)

이제 30일이면 같은 직장에서 부서만 바꿔 가며 29년6개월을 근속한 기간제 노동자 S씨는 해고된다. 이달 26일 계약기간 만료라며 해고통지도 날아왔다. 가장 먼저 정규직화가 완료됐어야 할 기간제 노동자가 30년 근속을 채우고도 일방해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 비정규 노동현실은 언제나 좋아질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2년, 환경대학원에서 15년5개월, 환경계획연구소에서 1년, 경영대학에서 1년10개월, 미술대학에서 1개월, 행정대학원에서 2년, 대학행정교육원에서 1년11개월, 행정대학원에서 6개월, 교무처 미래교육팀에서 2년10개월 연달아 근무했고 현재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1년11개월째 일하고 있다. 악랄한 쪼개기 계약을 집요하게 관철하는 한 경지를 보여 주는 근속 이력을 확인하며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든다. 무기계약직 전환을 막으려고 갖은 꼼수와 불법을 감행한 서울대 운영책임자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명색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10여년 일한 나도 이렇게 노골적인 기간제 정규직화 거부 사례는 처음 접한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과 정부 가이드라인은 보란 듯이 묵살됐다. 사회적인 공감대가 확인된 비정규직 규모 감축과 정규직화를 통한 좋은 일자리 만들기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S씨 사례를 듣고 우리나라에서는 사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기간제 노동자도 정규직화가 불가능할 수 있겠구나 절감한다. 대표적인 국립교육기관인 서울대가 이 지경이니 다른 곳은 오죽할까 싶다.

지난달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서울대 실태는 심각하다. 진작 꾸렸어야 할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는 구성조차 되지 않았다. 기간제 노동자 실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규직 전환 대상이면서도 배제된 기간제 노동자들은 도리 없이 재계약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올해 상반기에 전국 74곳 교육기관 중 정규직 전환 실적을 보고하지 않은 곳은 서울대가 유일했다. 모범사용주 역할을 해야 할 국립대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노동인권 사각지대로 전락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간 비정규 노동자들이 겪었을 심적 고통과 상처가 우려스럽다. 더 이상 무책임한 시간 끌기는 안 된다. 해고 통보는 즉각 무효화하고, 신임총장이 결정되는 대로 S씨를 비롯한 기간제 노동자들을 서울대가 직접고용 정규직화해야 마땅하다. 오랜 기간 자신의 피땀을 쏟은 일터에서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S씨의 마지막 호소가 가슴을 울린다. 제발 함께 살자.

“저는 무기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과 자격을 갖췄는데 그 대상에서 누락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근무하고 있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나 다른 부서에서 정년까지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총장 발령으로 신분을 정규직(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청을 드립니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제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절실한 문제입니다. 이제 제가 무기직으로 전환된다고 하더라도 (정년이) 5~6년 정도가 남았을 뿐입니다. 그 기간 동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을 드립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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