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아니 사람이,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거기에 무슨 인과관계니 법률이니 하는 게 필요하겠어요? 일단 공장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는 게 제대로 된 사용자라면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늦어도 너무 늦었어요. 더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해요.” 어느 유명한 노사문제 전문가가 삼성전자 백혈병 사태를 두고 했던 말이다.

백혈병·재생불량성빈혈·뇌종양·다발성경화증과 각종 암. 무시무시한 질병들이다. 무려 320여명의 피해자, 그중 사망자는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반도체 사업장에서는 사망자가 80여명이다. 황유미씨의 안타까운 사건이 있은 지 11년. 지난 23일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이 있었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머리를 숙이고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가족들의 안타까운 눈물뿐이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 용서와 배상이 행위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는 중재합의 내용대로 삼성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면 그 책임을 다했다고 평가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삼성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생각해 보면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꿨다”는 부분이 삼성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다. 돈만 있었지 당연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의’가 없었다. 사람을 돈벌이를 위한 기회비용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법률과 제도는 삼성에게 “계속 해도 됩니다”는 확신을 줬을 게다. 제도와 법률도 공범이다. 3월에서야 근로복지공단은 “질병과 직업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며 평택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김기철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공식적으론 처음 인정됐다. 이보다 앞선 2013년 고용노동부가 화정공장 특별감독을 실시하고 “작업환경과 안전보건 실태에 문제가 있다”고 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가동을 중단한다”고 했어야 한다.

이번 합의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도 많다. “이재용 재판이 급했긴 급했나 보다”고 꼬집기도 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상황이 아닌가.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인정하고 8천여명을 직접고용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28일에는 2만여명을 채용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세간의 말과는 달리 진심이 담긴 약속으로 반드시 지켜지길 바란다.

“황상기 아버님과 삼성 두 당사자 모두에게 가장 정중한 마음을 담아 경의를 표한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전 대법관)의 말이다. 이번 중재에 이르기까지 김 위원장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수많은 유가족이 양보하고 합의하지 않았겠나. 사회적 갈등을 중재로 풀어낸 묘미까지 볼 수 있는 명장면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에 적지 않은 한계도 느끼게 된다. 지난 11년간 발생한 산업재해가 법률적으로는 온전하게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도, 법원에서도 최근에서야 태도를 바꿨다. 다시 한 번 지적하지만 제도가 문제다. 산재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입증책임을 전환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된 지 오래됐다. 백혈병으로 쓰러진 노동자에게 자신의 질병이 어떤 물질 때문이라고 입증하라는 게 현행 제도의 모습이다. 누가 입증할 수 있는가?

그런데 노동자들의 주장대로 산재 입증책임 요건을 바꾸기란 여간 쉽지 않다. 결국 법률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해야 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마저 개악하는 입법부에서 산재 제도까지 개선하리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 “현존하는 대안은 사회적 합의뿐이다”는 게 노동현장의 중론이다. 마침 지난 22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내년 1월이면 민주노총의 결합도 예정돼 있다.

논의의제를 다양화해야 한다. 노동 3권 회복은 기본이다. 산재보상 확대는 필수적인 의제가 돼야 한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