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어떤 분이 태후라는 6개월 된 아기의 이름으로 매달 2만원씩 전태일재단 후원을 신청했습니다.”

지난주 전태일재단 사무처회의에 보고된 내용이었다. 다들 탄성을 터뜨렸다. 최근 전태일재단에는 매주 개인 또는 노조 이름으로 적게는 하나 많게는 열을 넘겨 후원이 접수되는 고마운 상황이 계속되는데, 그날 내용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손주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이 특별한 후원은 손주의 할아버지가 전태일재단 사회활동가 지원사업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서 나누는 후원이었다.

전태일재단은 2016년부터 사회활동가 지원사업을 한다. 하루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열두어 살 어린 여공들에게 제 차비로 풀빵을 사 주고, 자신 또한 장시간 노동에 지친 늦은 밤 평화시장에서 창동 집까지 2시간 넘게 걷고 뛰며 퇴근하다가 야간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쪼그려 잤던, 그렇게 수년간 밑바닥의 손을 놓지 않았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러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려고 몸부림쳤던, 그러다 한 점 불꽃으로 산화한 고마운 사람 전태일, 그의 풀빵정신을 잇는 사업이다. 노동자와 사회활동가의 자녀들에게 해마다 장학금도 수여한다.

사회활동가 지원사업은 1인당 1회 100만원에 불과한 적은 규모다. 첫해 19명, 지난해엔 20명을 지원했다. 그런데 올해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엔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의 사회공헌사업과 연동해서 추진했는데, 이번엔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전태일재단의 재정 형편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전태일재단은 명색이 재단이지만 돈으로 운동하는 재단이 아니다. 늘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재단이다.

빈곤한 사회활동가들 처지를 생각하면 사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15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사회활동가 지원사업으로 더 부족해질 재단 재정은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러고 공모를 했다. 최종 33명의 추천이 접수됐다.

주말에 출근해 홀로 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기 시작했다. 추천서에 담긴 사연이 하나하나 다 절절했다. 그들의 일상이 눈앞에 그려졌다. 단체 대표라는 직위 때문에 다른 사람 활동비 챙기느라 동분서주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런 활동비 없이 버티는 이, 노동자 임금이 오르도록 노력해서 임금이 올라가는데 본인의 활동비는 최저임금도 안 되는 이, 대부분 100만원이 안 되는 활동비로 버티는 이들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사회활동가의 일상 삶에 무심했던 지난날의 내 운동도 반성했다. 누군가 운동가의 일상 삶을 얘기하면, 운동가가 무슨 돈 타령이냐, 굶더라도 독립운동가처럼 운동에 헌신해야지, 라면서 타박하던 사람이 바로 한때의 나였기 때문이다.

선정위원회에서 판단하겠지만, 대체 누구를 선정하고 선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 마음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런 뒤에 울적한 마음 ‘혼술’로 달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뜻밖의 연대 손길이 다가왔다. 페친인 송경용 신부가 글을 읽고 개인적으로 200만원을 나눴다. 조금밖에 못 보태 미안하다 했다. 송경용 신부는 사회활동가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일찌감치 뜻 맞는 이들과 함께 ‘공익활동가협동조합 동행’을 만들어 이끌고 있는 이다.

또 있었다. 사연을 접한 서울신문 기자가 찾아와서, 사회는 진보하고 있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는 현실을 기사로 담았다. 그 뒤 기사를 봤다면서 김현희라는 한 시민이 전태일재단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사회활동가 지원사업에 꼭 보태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50만원을 보내왔다. 그렇게 250만원이 추가됐고 선정위원회가 소집됐다. 선정위원들은 몹시 난처해하면서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17명을 선정했다. 그러고서 남는 50만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사회활동가 지원에 꼭 보태달라는 한 시민의 아름다운 소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이 그 자리에서 센터와 상의를 하더니 30만원을 보탰다. 20만원은 전태일재단이 추가했다. 그렇게 3명이 추가돼 총 18명의 사회활동가를 지원하게 됐다. 비록 적은 액수에, 적은 인원이지만 전태일의 30원 풀빵정신이 담긴 사연이고 사업이었다.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1990년대 초반 전노협 시절이었다. 전노협에서 함께 활동하던 한 운동가가 어느 날 그만뒀다. 그만두면서 몇몇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말했다.

“얼마 전 퇴근하고 귀가하는데 동네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더라. 어느 한 아이가 유독 없어 보였다. 옷도 꾀죄죄하고 못 먹은 티가 났다. 나를 보고 반갑다고 달려와 손잡고 가면서 과자 좀 사 달라고 했는데, 사 줄 돈이 없었다. 그 애가 내 아들이었다.”

그이는 힘겹게 말을 하면서 남은 이들에게 미안해했다. 남은 이들은 한숨 쉬며 술잔 기울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이는 자신의 아이를 먹이고 입히려고 운동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이가 어디 그이뿐이던가. 활동가가 떠나더라도, 최소한 이제부터는 그렇게 떠나가지 않도록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활동가도 밥을 먹는다. 활동가는 헌신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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