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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특수고용 노동자를 말한다 ⑤ 방송작가] 빨간약을 집어 든 방송작가들조연미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을 3개월 앞둔 지난해 2월 <주간 문재인 6호>에서 특수고용 노동자를 가리켜 "이상한 사장님"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영상에서 "특수고용직에게 노동 3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9개월이 지난 2018년 11월 현재 문재인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1년 넘게 "실태조사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현장 노조간부와 노동자들이 '이상한 사장님'으로 사는 고충을 담은 글을 <매일노동뉴스>에 보내왔다. 건설기계·화물운송·플랫폼 노동자와 방송작가·경마기수·제화노동자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한다.<편집자>

방송작가노조(별칭 방송작가유니온)는 지난해 11월11일 출범했다. 꼬박 1년이 됐다. 출범 당시 40~50명이던 조합원은 260명이 훌쩍 넘게 됐다. 각자 ‘자신’의 공간에서 섬처럼 일하는 업무적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필자는 방송작가노조 출범 이후 크게 변했다고 느끼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방송작가가 노동자인가? 굳이 특수고용직에 들어가야 하냐?’는 물음에 분명 ‘YES’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 한류를 이끄는 연예인과 함께 일한다는 특별함, 내가 쓴 글이 브라운관에 멋들어지게 나올 때의 자신감, 가끔 사석에서 ‘어머, 작가세요?’라는 소리에서 느끼는 은근한 우월함은 방송작가가 노동자임을, 특히 특수고용직임을 인정하기 어렵게 하는 마음의 족쇄였다.

TV에서 다뤄지는 방송작가는 멋있고, 우아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인스타그램 스타들의 한 장면처럼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실상 많은 방송작가는 생계를 위해 투잡·스리잡을 하고 있으며, 섭외에서 자막은 물론 가끔은 PD의 잔무까지 처리한다. 완작을 마친 방송물이 불방되면 급여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송사들은 실제로 얼마나 많은 방송작가를 고용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정확히는 ‘안’하고) 있는데, 2016년 방송작가유니온·언론노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절대다수 방송작가가 불안정한 노동환경에 있는 셈이다.

지난해 11월11일을 기점으로 많은 방송작가가 자신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조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노동환경이 학습지 노동자, 건설기계, 방과후교사 등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됐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송작가들의 열정은 이런 노동환경을 더 이상 후배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다는 다짐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네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빨간약을 먹으면 인정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파란약은 지금처럼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게 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빨간약을 집어 드는 방송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계약서 한 장 쓰지 않는, 4대 보험은커녕 산재보험도 되지 않는, 원고료를 올려 달라고 말하면 작가가 무슨 돈을 밝히냐고 말하는, PD나 상사가 말없이 다른 작가를 구하면 1년을 했든 5년을 했든 짐을 쌓아야 하는, ‘특수고용직’의 현실을 직시하고 바꿔 보고자 하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빨간약 속의 세상, 관행이라 불린 불공정한 노동조건들을 조금씩 바꿔 보려는 용감하고 아름다운 선택들이다.

가능한 변화들이 생겼다. 방송작가노조에 체불임금 상담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없어서 못 준다던 체불 원고료를 주는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일부 방송사들은 방송작가노조와 단체협약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지난달 12일 방송연기자노조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방송작가의 노동자성 인정, 멀지만 멀지 않아 보인다.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그중 하나는 지난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권고로 도입이 시도된 ‘표준계약서’ 문제다. 신분과 지위, 계약이 없었던 방송작가들에게 계약서는 절실함이었다. 오매불망 바라던 ‘계약서’ 한 장이 지난해부터 시도되고 있지만, 현장에선 3개월·6개월짜리 방송작가를 양산하는 개악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방송원고에 대한 책임은 작가가, 저작권과 모든 권리는 방송사가’라는 갑질 조항 또한 슬그머니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이런 불공정한 노동관행 개선을 요구하면 정부는 우리의 위치를 문체부와 고용노동부, 방송통신위원회의 어느 중간 지점쯤에 놓고 핑퐁게임을 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힘이 세지면, 자본은 더욱 교묘하게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무력화시켜 왔다. 우리도 그 과정 속에 있다. 필자는 더 많은 방송작가가 노동조합 아래 뭉치고, 더 단단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출범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분명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왔으니까.

조연미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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