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고시원. 고시를 꿈꾸는 이들이 모인 곳. 하지만 그런 곳이 전혀 아니다. 실제는 밑바닥 인생의 막바지 피신처다. 고시원에 불이 났다. 일용노동자라는 이름을 달고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던 7명이 죽고 11명이 다쳤다. 또 2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원주의 한 공장에서다. 이번에는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들 또한 이 사회의 밑바닥이다.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노동자 7명이 죽은 고시원 건물 옆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전태일노동복합시설 공사다. 전태일의 이름을 단 건물이 내년 3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22살 청춘. 한창 꽃피는 나이다. 그 청년이 제 스스로 불붙이고 죽어 간 뜻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었다. 살아남은 노동자가 더 이상 신음하거나 황망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인간선언이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살리려는 생명의 선언이었다.

전태일 열사, 아니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밑바닥 노동자들이 불에 타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땅속에서 이소선 어머니 부여안고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당시 전태일이 손잡았던 평화시장 미싱사와 시다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 그대로다. 누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또 누구는 하청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누구는 장애인노동자고 이주노동자고, 또 누구는 노동에서도 밀려난 영세상인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는 또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며 인간다운 삶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전태일은 재단사였다. 재단사는 평화시장에서 상위 10% 안에 드는 노동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사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이소선 어머니를 살피며 안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보다 어려운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기꺼이 손을 잡았다. 부딪히고 부딪히다 끝내 제 한 몸 내놓았다.

1980년대와 90년대, 전태일은 광주항쟁과 더불어 시대의 심장이었다. 지금도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심장이다. 여전히 많은 사회운동가의 심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장이 식어 가고 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깃든 인간해방정신이 무디게 박제화되고 있다. 노동마저 갈라지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원청노동과 하청노동으로…. 틈바구니에서 장애인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다.

내후년 그러니까 2020년 11월13일은 전태일 50주기다. 아마 그 해가 되면 노동운동뿐 아니라 각계각층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태일을 호명할 것이다. 정치와 언론도 나설 것이다. 전태일재단은 보다 적극적으로 전태일을 불러낼 생각이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되살아나는 <태일이> 제작·관람 운동, 양극화 극복 캠페인 등을 다양하게 기획했다. 각계각층 노동·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지금부터 2년에 걸쳐 전태일운동을 하려 한다. 몇몇 노동단위와 함께 한국작가회의 및 상인운동 단위가 가장 먼저 응답했다. 모두와 더불어 진행할 운동이다.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운동이다. 호응과 연대를 희망한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 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에게 나눠 줬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때때로 전태일은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나 두 시가 지나 집에 들어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 4년 동안 계속되었다(전태일평전, 조영래).

항상 아이 같은 지금의 내 딸 또래 22살 청년. 어린 동심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며 죽음을 떠올렸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한구석에서 제 몸에 기름을 부으며 온몸이 얼마나 부들부들 떨렸을까. 몸에 불붙이고 뛰어나오면서 심장이 얼마나,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싶었을까.

이소선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마음 졸이며 했던 말씀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태일이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죽어 간 죽음으로도 충분하니까, 더 이상 죽지 말고 살아서 악착같이 싸워라.”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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