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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갑니다
▲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김영민

동트기 전 새벽,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든다. 첫차가 막 다니기 시작했지만, 어디선가 청년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이윽고 버스나 승합차가 멈춰 서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있다가, 혹은 혼자 서 있다가 차량에 탑승한다. 인력사무소 앞 풍경이 아니다. 매일 새벽 6시 서울지하철 여의도역 앞에서 방송·드라마 제작현장으로 스태프들이 떠나는 모습이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이한빛 PD가 세상을 등진 후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방송·드라마 제작현장의 열악한 노동실태가 비로소 알려졌다. 그리고 지난해 말 tvN 드라마 <화유기> 방송사고와 그 촬영현장에서 발생한 추락사고 또한 뒤늦게 알려지면서 다시금 논란이 불붙었다.

청년유니온은 지난 2월 새벽마다 여의도를 찾아갔다. 스태프들이 타는 버스에 올라 드라마 제작현장을 바꿔 보자는 마음을 전했다. 그래 봤자 별로 변하는 게 없다는 이야기도, 고맙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과 다산인권센터·언론노조·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함께 제보를 받아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했다. 6개 방송사의 31개 드라마에서 100건이 넘는 제보가 들어왔다. 견인차에서 촬영을 하며 안전장치 하나 없이 차량 위에 매달리고, 여전히 하루 20시간 넘게 촬영을 하고 있었다. 특히 만연한 외주제작사의 노동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촬영 중이면서 다수의 현장제보가 접수된 JTBC <미스티>, KBS <라디오로맨스>, OCN <그남자 오수>, tvN <크로스>를 근로감독 대상으로 지목했다.

특별근로감독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 드라마는 촬영을 마친 후였고, 현장에 청년유니온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동행하는 것을 제작사가 거부하기도 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도 광역근로감독과가 담당했으나 고질적인 인력 부족 문제도 있었다. 4월 초에 특별근로감독이 마무리된 후에도 결과 발표는 계속해서 늦어졌다. 용역계약이나 프리랜서계약을 한 스태프에 대한 근로자성 인정이 미칠 파급력 때문이었다. 근로감독 결과 발표까지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외주제작사의 원청인 방송사의 책임도 이야기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달 근로감독 결과가 발표됐다. 근로감독 대상이 된 3개 드라마 제작현장의 스태프 177명 중 157명의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외주제작사와 개별적으로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연출팀의 FD·AD·스크립터·스케줄러부터 제작팀과 촬영팀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스태프가 노동자임을 인정한 고무적인 결과다. 고정급을 받고 있고, 담당 업무가 정해져 있고, 제작일정에 따라 근로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며, 업무 수행에서 지휘·감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근로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용역계약과 프리랜서계약으로 노동법의 테두리를 피해 가려는 행태에 제동을 걸고, 특례업종 지정 제외와 맞물려 살인적 근로시간에 대해서도 노동법 보호를 받게 됐다. 다만 도급계약을 맺은 감독급 팀장은 사용자로 지목한 점은 아쉽다. 외주사와 팀장 간의 턴키계약은 보통 제대로 된 도급계약이라고 보기 어렵다. 조명감독·미술감독이라 해도 근로시간이나 업무내용에 지휘·감독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용역계약과 프리랜서계약을 맺었어도 근로자로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번 결과는 분명히 한 걸음 더 내디뎠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변화의 씨앗은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다. 언론노조는 지상파 방송사와 단체교섭에서 드라마 제작현장의 노동실태 개선을 이야기했고,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했고 tbs에서는 방송작가가 직접고용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희망연대노조에는 방송스태프지부가 새로 조직됐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노동자들의 쉼터이면서 신문고가 되고 있다. 이한빛 PD가 남긴 울림에 대한 대답은 계속되고 있다.

18일 청년유니온은 여덟 달 만에 다시 새벽 여의도역을 찾았다. 드라마가 좋아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고 있는 스태프들의 제보에서 시작된 변화다. 26일은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난 지 2주기가 된다. 상암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고, 만드는 사람이 행복한 드라마를 보고 싶다고 말하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간다. 원래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youngmin@youthunion.kr)

김영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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