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이다. 100주년에 앞서 한국이 기본협약을 비준하고, ILO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겠다고 공약했고, 노동존중 사회의 실현이라는 항목으로 국정과제에도 넣었다. 총회 연설은 가능할지 모르나 기본협약을 비준할 수 있을지와 관련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찮다. 여당은 먼저 법률을 정비하고 나서 비준하자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법 개정이 쉽지 않은 일이고, 여당 정치력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가 선 입법이 아니라 선 비준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왔다. 4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에 비상등이 켜졌다. 사용자들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입으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말하지만 일관된 속셈은 비준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정부 관료들은 늘 사용자 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체질적으로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노동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단체의 힘을 키우는 입법을 혐오한다. 자본을 등에 업은 관료들이 선 입법 논리에 편승해 비준 자체를 무산시키려 한다는 신호는 지난해부터 여러 경로로 감지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태생적으로 반노동 이념이고, 보수여당은 기회주의로 오락가락 행보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의 국회에서 입법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와 다를 바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준 투쟁에 앞장서야 할 노동운동까지도 법령이 정비돼야 비준이 가능한 게 아니냐는 자본·관료의 논리에 빠져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ILO 창립 100주년과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상반기까지 정치적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ILO 기본협약 비준은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노사정 모두 '선 입법' 논리에 빠져 있는 지금 정세를 돌아볼 때 노동운동이 '선 비준' 투쟁의 논리를 개발하고 제대로 된 대중투쟁을 조직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고 있다.

비준 투쟁은 ILO 기본협약의 토대인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87호 협약을 둘러싼 가장 큰 오해는 이 협약을 노동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87호 협약을 읽어 보면 각 조항의 주어는 노동자단체가 아니라 노동자단체와 사용자단체(workers' and employers' organisations)로 돼 있다. 다시 말해 결사의 자유는 노동자만의 권리가 아니라 사용자의 권리이기도 하다. 결사의 자유는 노동자만 특정해 보호하는 사회권이 아니라 사용자 등 모든 인민(people)에게 보장되는 초보적인(fundamental) 수준의 자유권, 즉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사용자단체 일반을 규제하는 법은 따로 없는데, 노동자단체(노동조합) 일반을 규제하는 법이 따로 존재하는 현실 자체가 결사의 자유 측면에서 볼 때 이상한 일이다. 사용자단체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는 법령은 따로 없고, 사용자단체 상근자 급여를 규율하는 법령도 따로 없다. 반면 노동자단체의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고 노동조합 상근자 급여를 억압하는 법령은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의 출발점이 87호 협약 비준이다.

결사의 자유를 더 잘 이해하려면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영어로 노동조합은 trade union이다. 여기서 trade의 뜻은 직업이다. 북한에서는 직업동맹이란 말을 쓴다. 하는 일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노동조합이다. 영어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 한국노총(FKTU)과 민주노총(KCTU)은 TU, 즉 trade union들의 연합단체다.

스웨덴에는 노총이 3개다.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총인 LO,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총인 TCO, 전문직 노동자들의 노총인 SACO가 있다. 이 중에서 SACO 산하 23개 가맹조직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trade union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의사협회·약사협회·회계사협회·관리자협회(기업의 고위 관리자조합)·건축사협회·군장교협회·물리치료사회·과학자협회·목사협회 등이 SACO에 속해 있다. 결사의 자유 측면에서 노동조합이란 개념을 분석하면 그 중심점은 '노동'이 아니라 '조합', 즉 결사에 찍혀 있음을 주목하자.

결사를 뜻하는 association은 우리말로 협회로도 번역된다. 결사의 자유란 특정 계급 혹은 직업 종사자들이 자기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자신들의 단체나 협회를 스스로 만들 자유를 권리로 보장해 주는 것이다. 조합이라 이름을 붙이든, 협회라 이름을 붙이든, 연맹이라 이름을 붙이든 작명은 단체 회원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대한민국에서 사용자들은 결사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데 비해 노동자들이 누리는 결사의 자유는 부당하게 억제되고 심하게 제한받고 있다.

노사정 모두 'ILO 핵심협약'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쓰는데 여기서 '핵심협약'은 잘못된 해석이며, '기본협약'이 올바른 번역이다. 핵심은 가장 안쪽이나 맨 위에 위치해 핵심에 이르는 데는 품이 들고 시간이 걸린다. 반대로 기본은 맨 앞이나 맨 밑에 위치해 이것을 거치지 않고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어떤 일을 이루려 할 때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길을 떠난다고 가정해 보자. 이 여정에서 핵심은 서울에 도달하는 것이고, 기본은 부산을 떠나는 것이다. ILO 기본협약의 첫걸음인 결사의 자유는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출발지인 부산을 떠나는 것을 뜻한다. 입법과 비준의 관계 문제도 마찬가지다. 입법은 서울에 도착해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고, 비준은 부산을 떠나면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준은 입법을 향한 디딤돌이며, 입법의 방향을 잡아 주는 나침반이다.

87호 협약은 노동권이 아니라 사용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자유권의 출발점이다. 87호 협약 비준 투쟁의 동력은 대한민국에서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누리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고용된 교원노조나 공무원노조가 아니라 여성과 청년 등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결사의 자유를 천명한 87호 협약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월급도 최저임금 수준이고 근로기준법도 제대로 적용 안 되고 4대 보험 혜택도 흐지부지해 사회적으로 취약한, 하지만 국민 일반과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하층 민중들을 위한 것이다. 공공부문 노조들은 87호 협약 비준 투쟁에 무임승차할 생각을 버리고, 공무원과 공공부문 노동자 기본권을 규정한 151호 협약(공공부문 단결권 보호 및 고용조건 결정을 위한 절차에 관한 협약) 비준 투쟁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현시기 ILO 기본협약 87호 비준 투쟁이 갖는 노동운동사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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