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베트남노총(VGCL) 12차 대회를 다녀왔다. 지난 25일 개회식에서 공산당 총비서 연설을 듣고, 국제대표단 일원으로 국가 지도부 및 노총 지도부와 기념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이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행사에 참가한 국제기구 전문가들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 문제를 논의한 시간이었다.

ILO 관계자에게 물었다. 대한민국 관료들은 물론 노동존중을 공약한 여당 지도부까지 ‘선 입법-후 비준’을 주장하는데, ILO 입장은 뭔가. 답은 나도 알고 있었다. ILO에는 ‘선 입법-후 비준’ 규정도, '선 비준-후 입법' 규정도 없다. 협약과 권고 규정을 명시한 ILO 헌장 19조는 "회원국은 사안을 관장하는 권한 있는 기관의 동의를 얻는 경우 협약의 공식 비준을 총장에게 통보하고, 해당 협약의 규정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취한다"고 돼 있다.

ILO가 2012년 개정한 '국제노동협약·권고 절차 핸드북'은 "비준과 관련해 ILO 헌장에서 해당 국가에 특별히 요구하는 사항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각국은 자체의 헌법 조항이나 관행을 따르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회원국 정부는 자기 나라의 절차를 거쳐 비준서를 ILO 총장에게 보내면 된다. 비준서는 “(a) 비준할 협약을 분명히 명시해야 하고 (b) 국가수반·수상·외교장관 혹은 노동장관 등 국가를 관장하는 권한을 가진 개인이 서명한 (팩스나 복사가 아닌 서면으로 된) 원본 문서로 (c) 국가가 관련 협약을 준수한다는 정부의 의사와 그 협약의 조항을 이행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분명히 전하면” 된다.

대한민국헌법은 국회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지고(60조)",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73조)",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은 "헌법개정안·국민투표안·조약안·법률안 및 대통령령안(89조)"이라고 밝히고 있다. 헌법적 결론은 명확하다. 국제조약을 비준할 권한은 대통령이 가지며, 국회는 대통령의 비준 행위가 입법과 재정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 한해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국제조약을 비준하길 원한다면, 심의를 거칠 대상은 국회가 아니라 국무회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판문점선언 모두 이런 헌법적 절차를 거쳐서 진행됐다. '선 비준-후 입법' 혹은 '후 이행'이 대한민국에서 이뤄지는 국제조약 비준에 관련된 절차이자 관행인 것이다.

20일 멕시코 상원이 ILO 협약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를 만장일치로 비준했다. 국제노동운동의 압력 속에 멕시코 정부는 98호 협약에 동의하고, 비준안을 2015년 12월1일 멕시코 상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멕시코 상원은 비준을 거부하고 3년을 끌다가 지난달 마침내 98호를 비준하게 된 것이다.

2016년 4월 멕시코 정부는 노동권 신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헌법 개혁과 노동법 개혁을 동시에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 헌법 개혁만 이뤄졌다(2016년 10월 상원 통과, 11월 하원 통과, 2017년 1월 주의회 통과, 2017년 2월 개정 헌법의 법률적 효력 발동). 입법은 좌절됐으나 노동권에 관련된 헌법 개혁이 이뤄진 데 대해 국제노동계는 "멕시코에서 결사의 자유를 가로막은 구조적 장애물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인더스트리올)" "지난 20년 동안 글로벌 노동조합운동이 멕시코에 가해 온 근본적 비판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달리 멕시코 대통령은 국제조약 비준권이 없다. 멕시코 대통령은 외교적 교섭을 지도하고 외세와 조약을 만드는 권한을 가지며, (이를 통해 이뤄진) 교섭과 조약을 연방의회 비준을 위해 제출한다(헌법 89조). 비준권은 상원이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상원은 공화국 대통령이 외세와 만든 조약과 외교적 협약을 승인한다(헌법 76조)." 이런 이유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은 98호 비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2015년 12월 상원에 비준안을 제출했다. 그러고 나서 2016년 4월 노동권 관련 헌법 개혁과 노동법 개정을 의회에 제안했고 3년이 흘러 마침내 멕시코 상원은 98호를 비준했다.

하노이에서 만난 국제노총(ITUC) 관계자에게 '선 비준-후 입법'이 일반적인 관행이냐고 물었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과 더불어 '선 입법'을 주장하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국이 선도하는 '선 입법-후 비준'의 역사를 짚어 보면 이렇다. 지미 카터 대통령(재임 1977~1981)은 직속으로 ILO위원회를 만들었다. 여기에 국무부 장관·상무부 장관·안보보좌관·경제정책보좌관·미국노총 위원장·미국국제무역협회장이 참여했다. 위원회는 1988년 "미국 연방법과 주법의 개정을 필요로 하는 ILO 협약에 대한 어떠한 비준 요청도 상원에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의했다.

입법형성기 나라는 '선 비준-후 입법'이고, 입법완성기 나라는 '선 입법-후 비준'라는 궤변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노동권과 관련해 입법형성기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베트남은 10월까지 국회에서 노동법을 개정하고, 98호 협약을 비준할 계획이다. 또한 관련법 개정과 연동해 2020년까지 105호(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 2023년까지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를 비준한다는 일정을 세워 놓고 있다. 공산당 일당 지배의 정치적 의지로 '선 입법-후 비준'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한민국헌법은 대통령의 비준권을 보장하고 있다. 한미FTA와 판문점선언 등 조약들은 모두 '선 비준-후 입법(이행)'을 거쳤다. 외국 사례는 자기 나라의 헌법과 관행을 따르라는 ILO 지침과 일치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ILO 협약을 비준하고, 국회에 동의안을 제출하면 된다. 이해찬·홍영표 여당 지도부는 '선 입법-후 비준' 사기극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선 입법'은 비준하지 말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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