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농단(壟斷).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해 이익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비유해 하는 말<맹자>”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10위권 경제대국, 21세기 문명국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언론지상에 사법농단 뉴스가 오르내릴 때 ‘설마 그럴 리가’ 하며 판단을 미뤘다. 마지막까지 사법부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양파껍질처럼, 그것도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상황을 보자니 억장이 무너진다.

KTX 승무원 사건,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현대차 불법파견 사건, 철도노조 파업 사건, 통상임금 사건 등등. 지난 9년여 대법원에서 판단한 노동사건이다. 작게는 해당 사건 노동자들이 피해자지만, 우리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던 사건들이다. 만약 이 사건들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단됐다면 오늘날 노동현장 노동자들의 삶은 참으로 많이 나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대법원이 이를 가로막았다. 훔쳐갔다.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고등법원 판단을 대법원은 상고 후 불과 3개월여 만에 “원심을 파기한다”고 판결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이다. 수년을 기다려도 나오기 어려운 게 대법원 판결인데 그것도 ‘파기환송 판결’을 이렇게나 신속하게 내리다니. 법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이라면 ‘뭐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2013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 방미 당시 지엠 사장의 ‘통상임금 사건 건의’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전원합의체를 통해 갖은 이유를 들어 “통상임금을 인정할 수 없다”고, 기존 입장을 180도 바꾼다. 대표적인 농단의 결과물이란다.

“나는 재심을 청구할 겁니다.” 필자가 담당했던 어떤 의뢰인의 말이다. 법리상으로, 논리적으로 그른 주장이 아니다. 사법농단으로 의심받는 내용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민사사건의 재심사유(민사소송법 451조) 중 △법률에 따라 판결법원을 구성하지 아니한 때 △법률상 그 재판에 관여할 수 없는 법관이 관여한 때 △재판에 관여한 법관이 그 사건에 관해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때 △ 판결의 증거가 된 문서, 그 밖에 물건이 위조되거나 변조된 것인 때 등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형사를 포함한 모든 재판도 비슷한 사유로 재심청구가 가능하다.

재심 이전의 문제일 수도 있다. 농단을 자행한 대법원은 대법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법관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라는 행위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재판이 없었다. 재심이 아니라 아예 지금부터 상고심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헌법 27조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재판받을 권리’가 지난 9년간 헌법에서 사라졌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수사기관의 철저한 수사가 예정돼 있지만 어디까지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그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양심에 호소할 뿐이다. 재판석에 앉은 그들이 자주 한 말이다.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라.” 이제라도.

농단을 처벌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동시에 사법제도를 새로이 해야 한다. 소는 잃었지만 지금이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좋은 제안들이 쏟아진다. “농단이 밝혀진 자들을 탄핵해야 한다”는 개별법관에 관한 것부터 “사법행정은 대법원에서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주장도 있다. 경청할 만하다.

여기에 나름의 생각을 보탠다면 다소 간접적일 수는 있지만 법원과 법관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제도설계가 시급해 보인다. 농단 대상으로 적지 않은 노동사건들이 희생된 이유가 뭘까. 사법농단의 큰 이유로 ‘법에 대한 무지’가 크게 작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노동은 더욱 그렇다. “대법관이 법을 모른다고?” 하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의 공개변론을 봤다. “대법관들이 정말이지 노동법을 모르네요, 저보다.” 통상임금 사건 공개변론에서 대법관들이 늘어놓은 질문에 어느 노조위원장의 반응이었다. 도대체 임금에서 신의칙이라니, 법 이전에 상식에 맞지 않은 판결에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선의를 믿더라도, 아마 노동관계법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노동법원 설립이 시급하다. 대법관수 증원뿐 아니라, 아예 전문 분야에 따라 대법원도 분할했으면 한다. 노동법원 설치의 방법·효과에 관한 연구는 충분히 돼 있으리라. 밝혀지고 있는 상고법원을 설치하려 했던 음모의 반대로만 설계하면 충분하리라.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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