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서울 서초구 A은행 지점. 30대 고객이 자동이체 한도를 풀어 달라고 항의하며 직원을 폭행했다. 은행 신고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은행을 찾은 그는 여직원에게 "서비스직인데 왜 이리 불친절하냐"며 "일할 때는 웃으라"고 소리쳤다. 5천만원이 넘는 돈을 인출하면서 직원에게 세어 달라고 요구했다.

같은해 12월 서울 은평구 B은행 지점. 50대 여성이 직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여행가방에 가득한 마른멸치를 바닥에 뿌렸다. 지점을 이사하면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고객 대면업무가 잦은 금융업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폭언·폭행 같은 문제를 겪는다. 국회가 2016년 3월 금융기관 감정노동자 보호와 관련한 5개 금융관련법을 개정했지만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다.

시중은행에서 창구업무를 했던 박아무개씨는 "민원이 발생해도 보고를 하지 않고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데 신경을 쓰는 분위기"라며 "고객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욕을 해도 가능하면 죄송하다고 응대하고, 상사에게서 불합리한 처우를 당해도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감정노동 관련법을 개정한 지 2년6개월 지난 시점에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자료가 나와 주목된다. 고객과 직장 상사에게 폭언·폭행·성희롱·괴롭힘을 당한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도 금융회사 사후대응은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사회연구소 '감정노동' 실태조사
노조 조합원 1만8천명 참여


2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금융노조 조합원 모바일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노조 조합원 10명 중 3명은 지난 1년 사이 고객에게 폭언을 들었다. 조합원 1만8천36명을 대상으로 6월부터 7월까지 3주간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5천672명(31.4%)이 폭언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폭행(1.2%)·성희롱(3.9%)·괴롭힘(14.2%) 피해를 경험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피해는 여성·비정규직·20대에 집중됐다. 무기계약직(44.1%)과 개인 고객 대면업무(42.7%), 여성(39.1%), 영업점·지점(39%), 20대(36.8%)에서 주로 피해를 입었다. 폭행·성희롱·괴롭힘 피해 경험 집단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2016년 3월 국회가 은행법·보험업법·상호저축은행법·여신전문금융업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을 개정함에 따라 금융기관은 △노동자 요청시 고객으로부터 분리 및 담당자를 교체하고 △감정노동에 대해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하며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직원을 위해 상시 고충처리 기구를 둬야 한다.

노동자들은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 실태조사에 답변한 조합원 중 2천45명(11.3%)은 "감정노동 피해를 담당하는 부서나 상담창구가 설치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기구 설치 여부를 모르는 조합원이 6천528명(36.2%)이나 됐다.

부서나 기구가 설치돼 있지 않거나 설치 여부를 모르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은 집단을 따로 추렸더니 비정규직(66.7%)·콜센터(63.7%)·입사 1년 미만 신입(63.2%)이 많았다. 무기계약직과 20대도 59.1%로 높았다. 폭언 피해를 자주 겪는 노동자들일수록 외려 보호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뜻이다.

피해 당해도 치료·상담 비율 낮아
95.9% "휴식·휴가 조치 없다"


치료·상담을 받은 노동자 비율도 낮았다. 고객에게 폭언·폭행·성희롱을 경험했을 때 대처 혹은 해소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물었더니 35.6%가 "없다"고 답했다. 피해를 당한 후 휴식이나 휴가 같은 조치를 받았는지 묻는 질문에는 95.9%가 "없다"고 밝혔다.

직장 괴롭힘 문제는 심각했다. 응답 조합원 중 7천919명(43.9%)이 상사에게 폭언을 포함한 피해를 경험했다. 피해자의 84.8%는 주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그냥 참고 넘겼다. 제도나 법률적 도움을 받은 피해자는 6.9%에 불과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종진 연구소 부소장은 "노조 조합원들은 고객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감정부조화를 경험하는 경향이 매우 큰데도 감정노동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나 절차운용 정도는 낮다"며 "감정노동 피해자에게 휴식·휴가를 부여하거나 고객의 과도한 언행이 있을 경우 노동자에게 현장을 벗어날 권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정부가 감정노동 대책을 세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3월 국회를 통과한 산업안전보건법은 감정노동자 피해에 대한 사업주 대응조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감정노동자가 건강장해를 입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사업주가 적극적으로 예방·사후조치를 해야 한다. 금융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금융관련법 내용과 유사하다. 10월부터 시행된다.

노조 관계자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감정노동 피해자는 휴식·휴가 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됐지만 보충할 인력이 없거나 회사 분위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며 "금융당국과 고용노동부가 감정노동 피해를 예방하고,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관련 대책을 세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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