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지난봄 곳곳에서 쏟아진 성폭력 사건 폭로가 한국 사회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검찰과 경찰, 법조계와 문화예술계, 학교, 영화계와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2016년 강남역 사건, 그리고 이화여대 시위에서 시작된 거대한 흐름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거쳐서 미투운동으로 이어져 거대한 해일이 돼 한국 사회의 근본을 흔들었다. 익히 알려진 유명인사의 이중적 면모에 많은 이들은 경악했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고 있는 야만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한국 사회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했던 정치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 때였다. 그러나 지난 14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성폭력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판결문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를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며 “위력은 행사되지 않았다”고 봤다. 권위적이지 않다는 근거에는 존댓말을 썼다거나 맞담배를 피웠다는 점, 무기명 토론방을 운영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안희정 개인의 이러한 모습은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서도 성폭력을 행하는 이중적 모습과 다르지 않다. 권력의 속성을 겸손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높은 사람이지만 권위적이지 않은 나’ ‘남성이지만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나’라는 자기 환상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탈권위’가 평소 언행이나 맥락과는 동떨어진 채로 이렇게 구성되는 것은 기시감이 드는 일이다.

판결문에서 “담배를 문 앞에 두고 갔어야 했다”는 부분에서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있으면 ‘악덕 업주가 아닌지 구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판결문에 적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적 폭행을 당하면 잘 피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지 사법부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 더구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이고, 그런 사소한 심부름조차 수행비서 업무의 일환으로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무시하고 있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업무 이외의 사적 지시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런 걸 잘 수행하는 것이 조직에 헌신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그러한 권력의 작동을 보지 않고 내리는 판결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판결인가. 모두가 아는 것을 사법부만 모르는 것일까.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공기처럼 느끼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의 권력관계에 이렇게나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특권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스스로 얼굴을 드러내고 폭로하고 일관되게 진술했음에도, 어느 때보다도 성차별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드높은 상황에서도 이토록 허술한 무죄 판결이 나온다면 어떤 성폭력 사건이 법으로 구제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희정 무죄 판결에 가장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일하고 있는 20대·30대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직장내 성폭력에 쉽사리 노출돼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4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이 목숨을 끊었다. 정규직 전환의 희망고문에 2년 동안 7차례나 계약과 해지를 반복해야 했던 청년의 유서에는 지속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쓰여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은 2년간 성폭력과 폭언·협박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을 얻었고, 결국 지난해 목숨을 끊었다. 유명 가구회사인 한샘에서 한 신입사원이 입사하자마자 겪었던 성폭력 사건은 얼마나 한국 기업 조직에서 여성에게 아무렇지 않게 폭력이 일어나는가 생각하게 한다. 하루하루를 남성들과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근래 쌓아 온 변화의 경험은 더 이상 이런 일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에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사법부를 규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시민들은, 여성청년들은 사법부가 조선시대만도 못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평등한 일터,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흐름이다. 사법부가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사법부는 일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보고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youngmin@youthuni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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