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난달 정부는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직장 괴롭힘 금지의무 도입을 결정했다. 올해 하반기부터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을 포함한 5개 법령을 고쳐 대책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폭력행위가 발생하면 철저히 수사하고 회사가 직장 괴롭힘 피해자·신고자에게 해고 등 불이익을 주는 일을 막고, 피해자에게는 산재보상과 법률상담·소송지원을 확대·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직장 괴롭힘 혹은 일터 괴롭힘은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거나 그의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건강을 훼손하는 행위’ 또는 ‘수치심·모욕감·두려움 등을 야기하거나, 적대적인 노동환경을 조성하는 등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을 주는 일체의 행위로서 노동자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편 8월 법원은 도지사이자 유력 정치인이었던 이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여성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가장 저급하고 추악한 수준의 일터 괴롭힘에 대한 법리적 판단은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성차별을 통한 평등권 침해, 인간 존엄과 인격을 침해당한 것에 분노한 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 미투(Me Too, 나도 피해자)를 외쳐야만 했다. 어쩌면 ‘괴롭힘’이라는 표현은 이번 사안에서 피해자의 고통과 여성들의 분노를 대변하기에는 너무 완곡하다. 그러나 이번 사안을 통해 일터 괴롭힘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권력을 쥔 도지사와 그를 수행하는 비서 간의 그토록 비정상적인 관계를 민주적이고 자연스러운 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공무를 위해 고용된 비서에게 문자를 통해 ‘맥주’ ‘담배’라는 단어 하나로 지시하고 사적 심부름을 거리낌 없이 시키는 것이, 한때 대통령이 되고자 했고 패기만만하게 차세대 정치주자를 자임했던 자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일터 괴롭힘·갑질 이해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일터 괴롭힘 일상화는 놀랄 일도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평생 1년 이상 직장경험이 있는 만 20세 이상 64세 이하 성인 남녀 임금노동자 중 표본추출된 1천506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수행한 ‘직장내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가 이를 반영한다.

최근 1년 동안 직장생활에서 존엄성이 침해되거나 적대적·위협적·모욕적인 업무환경이 조성됐음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73.3%였다. 한 가지 이상 괴롭힘 행위를 월 1회 이상 빈도로 경험한 비율은 46.5%로 절반에 가까웠다. 한 가지 이상 괴롭힘 행위를 주 1회 이상 경험한 비율은 25.2%로 네 명 중 한 명꼴이었다. 거의 매일 경험한 사례도 12%로 나타났다.

반면 직장내 괴롭힘 대응체계는 미비했다. 응답자 중 다수는 직장 동료·상급자·회사가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상담이나 고충처리를 요청할 수 있는 담당자 또는 창구가 있는 경우도 21.2%에 불과했다. 직장내 괴롭힘 정책이나 대응 절차가 마련돼 있는 사례는 적었으며 현재 직장에서 직장내 괴롭힘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경험은 22.5%에 그쳤다.

일터 괴롭힘 문제는 특정 조직이나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 권리와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다양한 사회적 개입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개입을 통해 기업과 사회의 인권 수준을 함께 향상시킬 수 있도록 내부의 자율적 활동, 외부의 개입, 사회적 프로그램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역할을 자임한 정부는 일터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법리적 판단기준을 수립하고 법적인 책임의 내용과 수준을 결정해야 한다. 향후 문제 방지와 해결, 피해 노동자 지원 법률 정비 등 사회적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성 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이 그래 왔던 것처럼 일터 괴롭힘 대응 역시 기존 권력관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새삼스러운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미투'가 여성들은 물론이고 권력구조 아래 약자들과 생계를 위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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