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왕은? “최저임금.” 실소를 짓게 하는 아재개그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최저임금의 처지가 초라해져 최저임금 1만원이 시대 요구로까지 공인된 시절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다.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의제가 이렇게 순식간에 정반대의 평판에 시달린 사례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책임을 따지자면 근본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정부와 집권여당 책임이 가장 크지만, 이해당사자인 노사 모두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 간 '을들의 대결' 구도로 치닫게 한 건 모두의 공동책임이다. 어느 일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문제해결을 꼬이게 하는 무책임한 행태일 뿐이다. 결국 청와대 자영업비서관이 신설돼 선임될 정도로 문재인 정부로서도 노동존중 사회 실현의 성패를 좌우할 문제가 됐다.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의 실질적인 성과는 단순한 최저임금 인상만으로는 인상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재벌 대기업과 건물주 중심의 부정의하고 기형적인 사회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최저임금 인상뿐 아니라 어떤 정책 처방으로도 불평등한 한국 사회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농단을 응징한 촛불항쟁의 정신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일상을 바꾸기 위해선 혁명적인 노동자-자영업자 중심 경제구조 전환을 이뤄 내야 가능하다는 엄연한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인간다운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로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혁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현실과 맞닥트리게 된 건 차라리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선 노사정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먼저 불평등한 한국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는 큰 방향에 대해 공감대가 확보돼야 한다. 그리고 지난 시절의 무책임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책임 있는 자세로 합리적인 정책대안과 세심한 이행경로를 모색하고 합의해야 한다. 임금 문제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사안은 선의만으로 일이 성사되지 않기에 대화와 타협의 자세와 기술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쟁점과 이견에 대해 인정하고 최소한의 교집합이라도 찾아 협상 진전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공한 선례가 있으면 다음은 보다 수월하다. 최저임금은 사회적 합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 대표적인 의제이므로 성공 사례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역으로 이마저도 실패하면 다른 사안은 사회적 합의를 시도하기조차 쉽지 않다.

현실은 갈수록 진창이다. 소상공인 단체들이 최저임금 불복종운동을 공론화하고 있다. 산입범위 확대에 이어 소송전을 통한 2차전도 치열하다. 산입범위 문제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영향이 심대한 최저임금 산정기준 근로시간을 둘러싼 법원 선고도 코앞이다.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으로 예고한 것처럼 주휴시간을 마땅히 포함해야 하지만 쟁점이 만만찮다. 만일 최저임금 산정기준 근로시간이 월 209시간이 아닌 주휴시간을 뺀 174시간이 된다면 그 결과가 치명적이다. 당장 올해 최저임금이 월 157만원대에서 131만원대로 뚝 떨어진다. 내년 최저임금도 174만5천150원이 아닌 145만2천900원이 된다. 올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금액으로 돼 버려 심각한 삭감이 현실화한다. 불평등 양극화 해소의 마중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최저임금이 보잘것없는 신세로 전락하는 꼴이 된다.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밥이 하늘이다. 밥을 나눠야 정의롭고 보다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일제 식민과 분단, 전쟁과 군부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줄곧 실패한 사회개혁 과제가 밥을 나누는 것이었다. 경제적 이해가 상충하는 임금 문제는 가장 민감한 쟁점 의제다.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가 필수다. 최저임금 인상의 선순환 효과가 사라지는 순간 불평등 양극화 문제 해결도 요원해진다. 지난 정부들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공멸하지 않으려면, 특단의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노사정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한다. 끈기 있게 타협점을 끌어내야 한다.

500만 저임금 노동자와 수백만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권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회 의제는 없다. 최저임금 인상이 무력화하면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 사회 실현은 실패로 접어든다.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도 피해자가 된다. 기득권층만 어부지리를 얻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어렵사리 재개된 사회적 대화와 신뢰 자산도 바닥을 칠 것이다. 빈사 상태가 된 최저임금을 살리지 못하면 최저임금만 죽는 게 아니다. 최저임금을 살려야 우리 사회가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는 첫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최저임금을 살리는 길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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