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감독관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한다. “연차휴가대체 합의서가 있더라고요.” 이로써 상황 역전이다. 얼마 전 연장·야간근로수당 청구건으로 찾아온 노동자는 여름휴가 3일 말고는 쉬는 날이라곤 없었다고 했다. 1년6개월 근무 후 퇴사했으니 미사용한 연차휴가는 수당으로 청구했다. 출석 조사에 나온 사용자는 “그런 걸 줘야 하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미사용 연차수당 금액을 확정한 며칠 뒤 근로감독관이 연차휴가대체 합의서를 내민 것이다. 진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근로감독관의 설명은 간단하다. 이 사업장은 3년 전 사업시작 시기에 노무사 자문을 받아 필요한 노동관계 서류를 다 구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사업주는 이 사건 근로자의 청구에 대응하기 위해 그때 서류를 찾아봤고, 그중 근로자대표가 사업주와 합의한 연차휴가대체 서면합의서가 있어서 제출했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 62조는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에 따라 연차유급휴가일을 갈음해 특정한 근로일에 근로자를 휴무시킬 수 있는 연차유급휴가 대체제도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 사업장에서는 유급휴일이 아닌 설·추석·광복절같이 달력에 표시된 '빨간날'에 연차휴가를 사용한 것으로 하는 연차휴가대체 합의서를 작성하는데,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라는 요건이 충족돼야 그 효력이 있다

그런데 ‘근로자대표’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근로기준법에는 단지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 이하 ‘근로자대표’라 한다)”고만 돼 있다.

연차수당을 청구한 이 노동자는 연차휴가대체 합의서에 서명한 근로자대표를 대표로 뽑은 적이 없다. 근로자대표 선출일이 이 노동자 입사일보다 먼저이기 때문이다. 근로자대표 이름을 확인한 이 노동자는 누구보다 관리자에 가까운 이 사람이 근로자대표라니 말이 되냐며 분노한다. 그러나 근로자대표가 될 수 없는 범위에 대한 규정, 근로자대표 선출시기, 절차, 방법에 대한 규정은 없다. 이 노동자는 합의서가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사업주도 몰랐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처음 노무관리 자문을 한 노무사만 알고 있을 이 문서는 케케묵은 먼지 속에 있다가도 그 힘을 발휘한다. 서면합의 내용을 게시할 의무도 없고, 합의 유효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로자대표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규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서면합의 효력을 수긍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순간에 연차수당을 도둑맞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에 ‘근로자대표’ 개념은 연차휴가대체 제도 이외에도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제한, 근로시간과 휴게·휴일 등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휴일근로를 포함해 연장근로를 1주 12시간으로 제한한 근로기준법이 시행되는 이 시기, 사업주들은 선택적·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을 위해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 요건을 갖추려 할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과반수 노동조합=근로자대표’인 대기업은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사업규모에 따라 단계적 시행을 앞두고 있는 근로기준법 적용 과정에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노동조건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로자대표’ 제도 보완이 필수적이다. 더 늦기 전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