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기자

"옛날에는 길을 가다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면 '에이, 재수 없어'하고 말았습니다. 사고 원인을 나의 운에서 찾은 거죠. 요즘에는 '누가 보도블록을 이 따위로 깔았냐'며 항의합니다. 사고 원인을 찾고 책임자를 찾는 거죠. 안전에 대한 책임과 권리의식이 그만큼 높아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 정책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영등포 안전보건공단 서울지역본부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박두용(55·사진)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안전 패러다임을 확 바꿔야 한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경미한 재해보단 사망사고 예방에 초점

문재인 정부가 국정 어젠다로 '안전'을 선포했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산재공화국'이라는 공식이 낯설지 않다. 지난해 9만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하다 재해를 입었고, 사고사망자는 964명이나 된다. 매일 240여명이 부상을 당하고, 3명가량이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인한 직·간접적 경제적 손실액은 22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150만대의 경차를 사서 사회복지단체에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자, 연봉 2천만원 노동자 100만명 이상을 1년간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산재는 국민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노동자 개인에게는 불행을, 가정에는 생계위협과 가정해체로 이어질 만큼 파급력이 크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2022년까지 산재사고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하면서, 40년 가까이 이어진 '무재해 운동'을 폐기했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 산재감축 정책의 포인트가 있다. 박두용 이사장의 설명이다.

"산재사고 사망자 절반 줄이기와 무재해 운동 폐기는 상충된 정책 같아 보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재원이나 자원이 한정돼 있습니다. 정부는 사소한 사고나 경미한 재해에 신경 쓰기보다 사망사고 예방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 이사장은 이를 자동차 접촉사고에 빗대 얘기했다.

"자동차끼리 경미한 접촉사고가 났을 때 자동차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굳이 경찰에 신고할 필요 없이 보험사를 통해 처리하면 됩니다. 국가가 일일이 개입해 사고조사보고서를 쓸 필요가 없는 거죠. 하나하나 개입하려면 엄청난 행정인력이 낭비되면서 정작 중대사고를 막지 못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올해 소방청이 문 개방이나 단순 동물포획 출동은 안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개인이 조심해야 하는 시대 지났다"

사업장을 쫓아다니며 '안전제일' 스티커를 붙이고, 노동자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해 봤자 '위험의 외주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안전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는 게 박 이사장의 생각이다.

"하청시스템이란 게 노동자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시스템이에요. 원청에서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용접을 하라면 용접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청노동자들에게 아무리 조심하라고 얘기해 봤자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박 이사장은 "생각을 바꾸면 이 문제를 푸는 건 쉽다"고 말했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책임져야 할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그는 건설현장을 예로 들었다.

"건설현장 사고사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추락사고를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안전교육한다고 막을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 제대로 안전비계를 사용하게만 해도 사망사고 절반은 줄일 수 있습니다."

비계는 노동자들이 높은 곳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강관비계는 파이프와 발판을 따로따로 사서 조립한다. 길게 연결한 파이프 위에 발판을 놓는 형식이다. 소규모 공사현장에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발판 없이 파이프만 사서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발판을 사다 놓고도 파이프만 설치하거나 발판을 띄엄띄엄 놓는 경우도 있다. 건설현장서 비계 추락사고가 빈번한 이유다.

시스템비계는 발판과 틀·파이프·방호대를 한꺼번에 설치한다. 노동자들이 안전대를 착용하고 작업할 수 있어 강관비계보다 훨씬 안전하다.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시스템비계를 쓰는 현장에서 추락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예 케이지처럼 짜여 있는 틀비계도 있다. 그런데 비용 탓에 시스템비계와 틀비계 시장점유율은 각각 16.7%, 3%에 불과하다. 나머지 80%는 강관비계 차지다.

박 이사장은 "일본은 강관비계가 아예 없고, 시스템비계와 틀비계 시장 점유율이 6대 4 정도 된다"며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강관비계가 없다면 시스템 비계나 틀비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 발판 없는 비계, 불량한 비계 사용은 현장에서 퇴출시킬 겁니다. 불량비계 사용 사업장은 1차 계도, 2차 경고를 하고 그래도 시정을 안 하면 고발한 뒤 작업중지 조치할 방침입니다. 소규모 사업주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공사금액 20억원 미만의 현장은 시스템비계 설치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어요. 시스템비계 점유율을 2022년까지 60%까지 끌어올리면 사업장에서 시스템비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시장을 아예 바꿔 놓는 거죠."
 

정기훈기자

"노사정, 시대변화 맞는 산재예방 방안 마련"

박 이사장은 산업안전보건업계에도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지난 5월 인천 남동공단의 한 도금사업장에서 입사 3주밖에 안 된 20대 노동자가 청산가리로 불리는 시안화합물에 중독돼 사망했다. 국소배기마스크 같은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도금조에 물과 시안화나트륨을 혼합하는 작업을 하다가 시안화수소에 노출된 것이다. 해당 도금사업장은 매년 작업환경측정을 받아온 곳이었다. 박 이사장은 "사업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읽어 봤냐"고 물었다. 그의 말이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읽어 보면 '이 물질은 장기적으로 흡입하면 어떤 증상이 생긴다'는 식의 내용이 7페이지나 됩니다. 사업주나 노동자가 '아, 시안화수소 중독을 반드시 예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작업환경측정기관은 사업주에게 '시안화나트륨은 잘못 관리하면 죽습니다. 반드시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하거나 보호장구를 착용해야 합니다' 하고 컨설팅했어야 맞죠. 진짜 중요한 내용을 작게 다룬 겁니다. 사업주들이 이런 보고서를 받으면 '아 그래요' 하고 그냥 파일에 넣어 두는 거죠. 인식 수준과 관행 전부가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박 이사장은 최근 발족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의제별위원회인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노사정이 함께 중장기적인 안전보건 강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박 이사장은 "국민의 안전요구 수준은 1인당 국민소득(GNI) 3만달러대를 훨씬 넘어선 반면 제도·기술·재원·인식·관행 같은 안전인프라 수준은 1만달러 후반대에 불과하다"며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안전은 국가적 차원의 장기적 투자가 중요하다"며 "시대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산재예방 체계의 근본적인 혁신방안을 마련하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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