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정년을 보장하라."

올해 금융산업 산별중앙교섭에서 금융노조(위원장 허권)가 제시한 요구안의 핵심 내용이다. 노조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어려움을 겪었다. 국책금융공공기관에서는 임금삭감·복지축소가 이어졌다. 금융 사용자들은 고임금 노동자라는 정부 공세를 배경 삼아 노조를 압박했다. 급기야 금융공기업을 중심으로 노조 산별교섭 파트너인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 탈퇴가 이어졌다. 2016년 4월께 협의회가 사실상 해체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에도 금융산업 노사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2016년 단체교섭을 체결하지 못한 노조는 4년 만에 이뤄지는 올해 교섭에서 52가지 요구안을 내며 공세적으로 임했다. 노조와 사용자협의회 간 교섭은 중앙노동위원회 쟁의조정 절차를 밟고 있다.

허권(54·사진) 위원장은 "노조는 지난 정권 9년 동안 정부와 사용자들의 임금삭감·복지축소 시도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며 "노동시간단축과 임금피크제 개선 같은 사회적 요구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산별교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오전 서울 중구 노조회의실에서 허 위원장을 만났다.

"사용자들 노동시간단축 질색, 주 52시간 시행조차 이견"

- 노조가 산별중앙교섭에서 주 40시간 이하 노동을 명문화하는 등 노동시간단축과 관련한 굵직한 제안을 많이 했다. 어떤 부분에 초점을 뒀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단체교섭이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강제적으로 추진한 성과연봉제와 복지축소에 대항하는 자리가 있었을 뿐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려 한다. 사측의 무관심과 정부의 간섭 속에서 못해 왔던 과제들을 추려내 금융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안건으로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금융산업은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각종 신기술 도입으로 비대면 거래도 늘어나고 있다. 다가오는 산업변화에 대비해 금융산업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 4일제 도입을 비롯한 노동시간단축과 일자리 창출 대안을 준비하고 있다. 사전단계로 주 40시간 이하 노동을 올해 단체협약에 명시하려 하는데 사용자들이 질색한다. 노조 바람과 달리 주 52시간제 시행을 두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인식차가 너무 크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하루 1시간 휴게시간을 보장해 달라는 정상적인 요구도 사용자들은 반대부터 한다. 지금 금융노동자는 점심시간에 무료노동을 하고 있다. 휴식권과 휴게시간 보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자는 취지다. 그럼에도 사용자들이 거부한다."

- 주 52시간제 정착을 위해 금융산업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은행 사용자들을 만나 독려했는데.

"금융산업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면서 내년 7월1일부터 주 52시간제를 시행해야 한다. 금융업이 노동시간단축을 선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이라도 도입하자는 데 노사는 물론 정부와도 공감대가 있었다. 노동시간단축은 곧 일자리 창출이다. 사측은 청년실업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희망하는 사회적 요구를 생각하지 않고 비용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올해 7월부터 시행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는데 사용자들이 저항했다. 이대로라면 연내 시행도 어려운 분위기다. 최근 교섭에서 사용자들은 IT 부서와 자금관리·탄력점포는 주 52시간제 시행을 예외로 하자고 주장한다.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직무에 종사하는 금융노동자들을 빼면 실제 주 52시간을 적용받는 노동자는 소수에 그친다. 예외로 인정해 달라는 노동자 범위가 넓다는 것은 사용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시킨 노동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 노동이사제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왜 필요한가.

"경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통령과 정부도 국가경영 파트너로 노조를 인정한다. 사용자들은 교섭에서 노사가 경영의 주축이라고 했다. 선언적인 의미가 아니라 노동자가 그런 역할을 한다. 작은 요구로서 노동이사 추천제, 한 발 나아가 노동이사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사용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공기업도 하고 민간기업도 하는데 금융산업에 왜 적용하지 못하나. 이번 교섭에서 사측은 경영간섭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경영간섭에 해당하는 노사 교섭은 왜 하나. 사측 주장대로라면 교섭도 하지 말아야 하고, 종국에는 노조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경영간섭이 해소된다. 이걸 바라는 건가. 노동자는 회사가 잘되기를 가장 바라는 이들이다. 노조는 이해당사자이지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다."

"노조가 견제했더라면 대규모 채용비리 불가능"

- 금융권 채용비리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나.

"사측을 철저히 견제하지 못했다. 사과드린다. 채용비리는 전부 최고경영진에 의해 발생했다. 노동이사제가 도입돼 있었거나, 노조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더라면 채용비리가 이처럼 대규모로 광범위하게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영진이 은행을 자기들만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지주회사 회장을 스스로 추천하고 스스로 연임했다. 누가 보더라도 비정상적인데 자기들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노조가 견제했더라면 오늘날 금융산업이 국민에게 집단적 비판을 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 과당경쟁 폐해는 익히 알려져 있는데도 은행들이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시중은행들이 한 광역자치단체 금고 쟁탈전을 벌였다. 기부금 3천억원을 제시한 은행이 시금고로 선정됐다. 이들 은행이 다른 광역자치단체에서 또 금고 쟁탈전을 할 것이다. 출혈경쟁을 한 은행들이 어디서 본전을 찾으려 하겠나. 신용등급이 낮아 고금리를 적용받는 서민들 주머니에서 대부분 빼낸다. 과당경쟁 피해는 국민과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금융산업 스스로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협약을 맺어야 한다. 노조는 금융산업을 망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산별교섭에서 과당경쟁 축소·방지를 요구하고 있다."

- 은행권에서 "핵심성과지표(KPI)에 남북통일을 넣으면 통일이 금방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노조와 합의해서 설계했다면 좋은 제도로 안착할 수 있었다. 금융산업 노동자들이 조금 더 좋은 직장문화 속에서 일하고, 회사도 경영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KPI는 어떤가. 금융권 노동자들의 자살률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과당경쟁과 실적압박이 원인 중 하나다. 되묻고 싶다. 시골과 도시에 있는 점포에 똑같은 실적을 요구하는 게 공정한가. 시골점포 노동자가 업무를 마친 뒤 도시로 와서 주변인들에게 카드를 만들어 달라거나 펀드가입을 요청하고 있다. 조선산업이 무너져 지역경제가 흔들리는 군산의 은행노동자들에게 금융상품 판매를 압박한다고 성과가 나올까. 이런 문제를 감안해 제도를 개선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 임금피크제 문제가 쟁점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금피크제가 구조조정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년을 앞당기는 효과를 낸다. 노조는 정년연장을 통해 임금피크제 진입시기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노동자는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퇴직하거나 이전 직책을 박탈당하고 매년 삭감되는 임금을 감내해야 한다. 지금 만 55세(63년생) 노동자는 63세가 돼야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이들이 회사를 떠나면 8년 정도를 수입 없이 버텨야 한다. 퇴직시기와 국민연금 수령시기를 맞추는 게 맞다. 임금피크제는 사회·경제적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50대 중·후반 인력을 도태시키는 제도다."

- 국책공공기관의 자율교섭을 보장하라는 제안은 어떤 내용인가.

"사용자들이 산별교섭에서 자기들 권한이 아니라며 난색을 표했다. 공공기관은 단체교섭권을 사실상 행사하지 못한다. 지침이나 예산을 쥔 기획재정부 결정에 따라 기관 임금과 복지 등 노동조건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정부가 부당노동행위를 하는 형국이다. 이대로라면 공공기관 노사관계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유사하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노사가 산별교섭에서 '공공기관 자율교섭 보장'에 합의하고 정부에 '잘못하고 있다'고 경고해야 한다. 선언적 합의에 그치더라도 공공기관 노동 3권 보장을 위해 정부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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