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명호 변호사(법률사무소 함께)

사소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얼마 전 소수노조 조합원들을 대리한 사건에서 패소했다. 청구금액은 적었지만 승패에 따라 소수노조 단결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상대방은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켰다. 회사는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수임료 영수증은 없었지만 KTX 영수증은 쌓여 갔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쟁점은 명료했고 유사 사건에서 승소한 판결문도 제출했다. 우리는 내심 결과를 낙관했다.

판결 선고일,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긍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왔습니다. 일단 판결문을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틀 뒤 판결문이 나왔다. 판결이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소액사건의 판결서에는 소액사건심판법 11조의2 3항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법은 법관에게 소송가액 3천만원 이하의 '작은 사건'에는 판결이유를 적지 않아도 되는 아량을 베풀었다. 판결이유를 알아야 항소를 할 텐데 항소를 해야만 판결이유라도 알 수 있게 됐다.

지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하니 항소를 한다. 그런데 그전에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항소해서 지면 소송비용을 두 배로 물어 줄 각오, 대법원에서 지면 세 배를 물어 줄 각오다.

종전에는 소송가액 1억원 사건에서 패소하면 480만원을 물어 주면 됐다. 대법원에서 패소하더라도 최대 1천440만원을 물어 주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740만원을 물어야 한다. 대법원에서 패소하면 무려 2천220만원을 물어야 한다. 대법원이 올해 4월부터 소송비용에 산입되는 보수규칙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지만 누군가에게는 재판청구권이 달린 절박한 문제다.

고민과 각오 끝에 대법원으로 간다. 재판 기간은 3개월 남짓, 심리불속행기각 판결을 받는다. “상고인의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은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상고심법) 4조에 해당해 이유 없음이 명백하므로 상고를 기각한다.” 대법원에서 판단조차 받지 못하고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된 민사 본안사건이 전체 10건 중 8건이라고 한다. 우리는 때로 판결이유를 알기 위해 항소하고, 수천만원을 물어 줄 각오를 하고서야 대법원 문턱에 선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결이유 한 줄 적어 주는 데 이렇게나 인색하다.

속없는 나는 그래도 사법부는 우리가 기댈 최후의 보루라고 변명했다. 회사가 재판 막바지에 선임한 대형로펌 변호사가, 서면 한 장 제출하지 않은 전관 출신의 그 변호사가 재판장의 고등학교 선배라는 걸 확인하면서도 나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단언컨대 내가 지난 1년 동안 겪은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 작고 사소하다. 법관을 충원해서 판결이유 좀 받아 보자는 요청에 대해 “진보인사의 최고법원 진출”이 우려된다고 반대한 일, 입맛에 따라 법관을 사찰하고 재판에 개입해 법관과 재판의 독립성을 저해하려 한 일,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해 재판을 청와대와의 거래수단으로 삼은 일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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