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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의해 짓밟혔지만, 주체로 거듭난 사람들 <서산개척단>
▲ 영화평론가 황진미

<서산개척단>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벌어졌던 인권유린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5월24일 개봉했다.

‘서산개척단’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대한청소년개척단’이란 이름으로 서산지역에서 벌인 강제노역 사건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 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증거 소실을 이유로 2010년 6월 ‘진실규명불능’ 결정이 내려졌다. 진실이 묻힐 뻔한 순간이었지만, 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진실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다큐멘터리 <블랙딜>(2014)을 통해 민영화 폐해를 알렸던 이조훈 감독은 서산 출신 후배에게 서산개척단 이야기를 제보받은 뒤 취재에 나섰다. 증언을 피하던 피해자들이 인터뷰에 응하면서 50여년 전 끔찍한 진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드러난 진실들은 지난해부터 조금씩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연극 <언덕을 오르던 마삼식씨는 누가 죽였나>가 공연된 데 이어 같은해 12월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속기사가 실렸다. 올해 3월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대중에 이름이 알려졌다.

1. 박정희판 ‘군함도’

팬티 한 장 입은 비쩍 마른 사람들이 삽 한 자루씩 매고 줄지어 걸어가는 사진을 보노라면, 일제강점기 때 사진인가 싶다. 납치를 당해서, 혹은 돈을 벌게 해 준다는 말에 속아 그곳에 갔다는 이야기,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두들겨 맞았으며 보리밥에 간장 물로 끼니를 때우고, 토굴에서 잠자며 살인적인 노역에 시달렸다는 증언을 듣노라면 더욱더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할머니들의 증언은 더욱 기막히다. 수예학원에 데려다주겠다거나 월급을 두 배로 주는 모포공장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속아 왔으며, 감금된 채 처음 보는 남자와 강제로 결혼을 했다. 외부에는 온통 부랑자와 윤락녀들에게 새 삶을 찾아 줬다고 거짓홍보를 해 놓은 탓에, 50년이 지난 후에도 서산개척단 피해자로 나서기 힘들었다는 대목에선 은폐되던 ‘일본군 위안부’ 역사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것은 일제의 조선인 학대가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자행한 학대다.

5·16 쿠데타 직후 집권세력들은 ‘국토재건’을 명분으로 서산군의 국영 염전이 있던 자리에 전국에서 동원한 1천700명의 청년들을 몰아넣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서산뿐이 아니었다. 전남 장흥 등 1970년까지 전국에 140개가 넘는 간척사업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간척사업을 1955년부터 존재했던 미국의 국제원조사업(PL-480)과 연계했다. 한국 농업을 육성하기 위한 1천억원의 원조금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원래 미국 원조금에는 개척단들의 식비와 임금이 책정돼 있었지만 중간에서 착복됐다. 국가사업을 위임받은 민정식 단장이 가로챘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박정희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1967년 선거에 쓰였다. 박정희 정권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던 서산개척단원들의 피땀이 마지막까지 박정희의 정권연장을 위해 쓰인 것이다.

2. 주체로 거듭나는 피해자들

영화는 서산개척단의 은폐된 진실을 고발할 뿐 아니라 만듦새와 윤리 측면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 준다. 감독은 말끔한 내레이션을 쓰지 않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게 한다. 또한 재연화면으로 당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연극으로 재현된 장면을 보는 피해자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적 접점을 만들어 낸다. 감독이 일방적인 설명으로 자료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직접 국가기록원에 가서 그 자료들을 넘기게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피해자들을 구제받아야 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겪은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해결을 위해 나서는 주체로 그리는 것이다. 영화는 각성한 피해자들이 정부에 진실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서는 결말로 나아간다.

영화는 피해자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무고한 피해자가 아님을 드러낸다. 그들 중에는 건달생활을 하다가 자원해서 개척단에 온 사람도 있다. 그는 이후 납치돼 온 이들을 때리고 군기를 잡는 ‘구호반’ 역할을 했다. 납치돼 온 피해자도 "부랑자가 아니었는데 억울하게 잡혀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도 깡패, 나도 깡패인데 서울 종로파 깡패는 공무원처럼 군림했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부랑자가 아닌데도 잡아 온 후리가리(경찰의 일제단속을 이르는 은어)가 강조되면, 부랑자들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납치되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일이 된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 당시 13년간 납치된 부랑자는 25만명에 달했다. 그들이 부랑자였든 깡패였든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경험 차이는 존재한다.

개척단에서 중간관리자 노릇을 했던 이는 “거기서 하고 싶은 거 다 했습니다. 높은 데 있었으니까”라고 말한다. 감독은 그가 닭백숙을 대령시켜 먹던 경험과 납치돼 온 단원이 뱀과 개구리를 잡아먹던 경험을 인터뷰로 교차시킨다. 영화 <군함도>에서 봤듯이, 그들 사이의 위계가 상이한 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감독이 죽은 사람에 대해 묻자, 그는 “거기서 죽은 사람 없습니다” 하고 말하다가 돌연 눈물을 쏟는다. 마음의 얼음이 깨지는 순간이다. 물론 죽은 사람은 무수히 많았다. 단원들의 진술로 보면 족히 100명은 될 듯하지만 공식집계조차 없다.

영화의 인터뷰는 개척단원들이 민정식 단장을 몰아냈던 사건을 들려준다. 짐승처럼 취급받던 이들이 봉기해 민정식 단장의 비위사실과 요구사항들을 적은 탄원서를 들고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앞으로 몰려가 농성하며 정부와 협상을 했다는 순간은 영화 <실미도> 장면보다 극적이다.

정부는 1967년에 민정식 단장을 해임하고 개척단 해산을 명령했다. 하지만 359세대의 개척단원들은 남아서 자체적으로 개간을 계속했다. 1981년 마침내 100만평(330만6천제곱미터)의 땅이 개간돼 첫 수확이 이뤄졌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에게 뒤늦게 임대료를 내라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개척단원들이 끝까지 남아 개간을 완성한 이유는 땅을 나눠 주겠다는 정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1968년 가분배한 땅을 1971년 극비리에 국유지로 전환했다. 경작권만 인정할 뿐 소유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를 상대로 재판도 해 봤으나 모두 패소했다. 비슷한 간척사업장이던 장흥에서 1966년 무상분배가 이뤄진 것과 비교해도 형평에 맞지 않는 처사다. 영화가 시작될 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돼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마무리해 주려나 하는 기대를 걸고 인터뷰한다”고 입을 떼던 피해자가 다큐멘터리 말미에서 직접 문재인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쓰고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여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국가폭력에 짓밟혔지만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다시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황진미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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