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걸 가지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며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 결과를 틀었다. 그들에게 법과 정의, 인권은 없었다. 대통령 파면까지 몰고 온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이어 이번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설치라는 숙원사업을 이루기 위해 박근혜 정권에 충성심을 확인시키고,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전교조 법외노조 소송 판결시점을 저울질했다.

◇“국정운영 동반자 이미지 최대한 부각해야”=법원행정처가 지난 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담은 문건 98개를 추가로 공개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4년 12월3일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전교조 법외노조 통분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에 따르면 당시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심판 결과를 예의 주시했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오기 보름 전에 작성한 문건에서 법원행정처는 “통진당 위헌정당해산심판 사건과 상관관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위헌법률심판 사건의 결정시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당시 법원행정처의 노골적인 정권 눈치보기는 98개 문건에 고스란히 담겼다. 법원행정처는 2015년 3월15일 작성한 ‘국무총리 대국민담화의 영향 분석과 대응방향 검토’에서 세월호 사건과 통진당 위헌정당해산심판 사건을 언급하며 “초반에는 다소 무리해 보였지만 속전속결·총력전식의 수사를 통해 검찰·법무부는 BH의 신임을 획득했다”며 “정권으로부터 체제·정권 유지의 협조자, 국정운영의 동반자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헌법은 입법·행정·사법의 삼권 분립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국민 기본권 보호를 위해 재판 과정에서 외부 압력이나 간섭을 배제한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된 심판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문건 어디에도 사법부 독립은 찾을 수 없다.

법원행정처는 “검찰권 적절한 견제 vs 정권과의 적정한 관계 유지 틀 속에서 사법부가 적정한 스탠스를 유지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 공작과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에 대한 “사건 처리 방향과 시기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법원행정처는 기획조정실을 통해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관련한 청와대 동향을 파악했다. 법원행정처는 같은해 12월19일 작성한 '통상임금 판결 선고 후 각계 동향' 문건에서 청와대가 대외적으로는 판결에 대한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봤다.

◇“5건 노동사건 모두 파기환송”=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은 왜 이토록 정부 의중을 살피며 눈에 들고 싶어 했을까. 법원행정처는 2015년 7월 작성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최종 정책결정은 VIP의 몫이고, BH의 입법 협조 획득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는 “정치적 쟁점이 내포된 사건 등에서 여권에 불리한 재판으로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사법부가 대통령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KTX 승무원 사건 △정리해고 사건(콜텍·쌍용자동차) △철도노조 파업 △전교조 시국선언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 등 노동사건 5건을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을 근거로 삼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달 1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심 재판이건 간에 부당하게 간섭·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며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재판을 흥정거리로 삼아서 재판 방향을 왜곡하고 그것으로써 거래를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고소·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지난 5일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고소·고발했다. 키코공동대책위원회·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전교조·통합진보당 대책위원회를 비롯한 17개 단체가 고발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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