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이런 말이 있다. 판사는 오직 판결로 말해야 한다고. 각종 사회문제에 관한 입장을 묻기라도 하면 판사들이 하는 말이고, 어떤 때는 입장이라도 낼까 봐 판사들을 단속하는 말이기도 하다. 판결은 주문과 그 주문에 이르는 이유로 쓰인다. 주문은 결론이니 판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유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요즘 나는 이 나라에서 대법관 등 판사들의 판결 이유가 궁금하다. 판결문에 기재된 이유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떠한 이유에서 그와 같이 판결했던 것이냐고 묻고 싶다. “판결로써 말해야 했을 때 침묵하기도 했고, 판결로써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기도 했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 돌리기도 했다”(1993년 3차 사법파동 성명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 중). 언제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을 지난달 26일 대한변호사협회 논평에서 나는 읽었다. 전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3차 재조사 최종 결과를 발표한 데 대한 논평에서 1993년 6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이 “지난날 사법부의 비겁함을 꾸짖는 역사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속죄하고, 과거사 반성과 청산 없이는 사법부 개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밝혔던 성명서 내용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 이 나라에서 변호사단체는 25년 전에 법원 판사들이 했던 고백을 소환해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행정권 남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3차)가 발표되자 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별조사단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에 대한 성향이나 동향을 파악한 문서가 발견됐지만, 이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고 인정할 자료는 없으므로, 법원행정처가 특정성향을 가진 판사명단을 작성해 동향을 감시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주려 했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은 없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결론 발표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 특별조사단의 조사 내용들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특정 판사의 성향·동향·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것은 물론 상고법원 도입 등 법원 숙원사업을 위해 재판을 정치권과의 협상카드로 활용하려고 한 정황 등이 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혀지면서 의혹은 사실이 되고 의심은 비판이 됐다. KTX 승무원 등 구체적인 사건 당사자들의 경우는 대법원을 찾아가 분노하고 고소고발을 통해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법원행정처장이 발표한 조사보고서(3차)는 ①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의 독자적 정책 노선인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개별 사건을 거래 목적물로 삼아 법무비서관 등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통해 청와대와 광범위한 교감을 시도한 사실 ② 이 과정에서 법원행정처가 개별 사건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해 당해 사건을 검토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하거나, 개별 사건의 상고심 재판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것인지 여부를 검토한 사실 ③ 법원행정처가 개별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의 심증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려 한 사실 ④ 법원행정처가 판사들로 구성된 법원 내 특정 연구회의 형해화를 시도한 사실 ⑤ 법원행정처가 대법원 정책 방향의 반대 입장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법부 구성원에 대해 개인의 재산 상태 등 사법행정과 무관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찰을 시행한 사실 ⑥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제가 불거진 이후 “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 “인사모 관련 검토” 등의 제목이 부여된 파일 등을 포함해 2만4천500개 파일들을 임의로 삭제한 사실 등을 확인했다. 조사보고서를 통해 이런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은 없다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커다란 분노가 일고 있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단장인 특별조사단은 판사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결론을 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해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를 이유 있게 고발했어야 했다. 그것으로 지난 시절에 잘못된 일로 정리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정리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3. "하물며 재판을 무슨 흥정거리로 삼아서 재판 방향을 왜곡하고 그걸로써 거래를 하고 그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부인했다. “그런(재판거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재판을 한 대법관을 비롯한 법관들에게 심한 모욕이 될 것”이라고 지난 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재판거래 의혹을 부인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등에 관한 의혹에 대해서도 자신은 “그런 것을 가지고 법관을 인사상 또는 인사상이 아니라도 어떤 사법 행정처분에 있어서도 법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단호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호히 아예 그런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부인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의혹을 부정하면서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재판의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혹시 대법원 재판에 의구심을 품으셨다면 그런 의구심은 거두어 주실 것을 앙망한다”고 덧붙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입장에 따른다면 판사 사찰과 청와대와의 거래 내지 교감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 아닌 법원행정처 담당자가 제멋대로 한 것이 된다. 아 다시 꼼꼼히 기자회견 내용을 읽어 보니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는 아니라도 뒷조사 등 판사 사찰을 하고, 재판거래는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스스로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판결을 했노라고 알리면서 박근혜 청와대와 교감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고 읽힌다. 뭐 그렇다고 이를 인정한 것도 아니다. 분명히 양승태는 이와 같이 기자회견을 한 이유가 있을 텐데 아직은 나는 그걸 알지 못한다. 아마도 고소고발로 수사를 받게 되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4.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 왔다”며 “국가경제발전 최우선 고려”해서 대법원이 통상임금사건 판결을 했고, 대통령이 추진 중인 노동 등 4대 부문 개혁을 강력히 지원하는 노동관련 판결을 했다고 대외비문건 ‘현안 관련 말씀 자료’(2015년 7월)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 문건에서 “단순한 법리적 검토뿐만 아니라 국가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최대한 면밀히 고려했다”며, 구체적으로 통상임금사건 판결을 그 사례로 들면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단순히 포함시킬 경우 우리 경제 전체가 안게 될 부담(약 38조원으로 추정됨)을 최대한 고려해 민법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들어 소급적용을 제한시켰다”고 밝혔다. 그리고 “노동부문의 선진화와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바람직한 노사관계의 정립을 위해” KTX 승무원사건에서 “한국철도공사가 근로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했고, 콜텍과 쌍용차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으며, 철도노조 파업사건을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이 특별조사단 발표로 알려지자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한 거라며 규탄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이것이 재판거래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씀 자료’는 해당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 작성된 것이라서 양승태 대법원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나눌 말씀 사항으로 그동안 해 온 판결들 중에서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것만을 골라 정리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특별조사단 조사에서 법원행정처 관련자들은 그렇게 변명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기자회견에서도 그런 취지의 변명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러니 본격적인 수사가 없었던 지금까지는 이 ‘말씀 자료’를 재판거래의 입증 자료라고 단정할 순 없다. 그렇다고 ‘말씀 자료’가 정당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아무리 재판거래 문건이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대법원장이 대통령과 나눌 정당한 ‘말씀 자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원행정처 스스로 밝힌 판결 이유가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장된 노동기본권과 노동자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경제 발전과 정부 노동정책에 부합하는 데 봉사하기 위한 것인 양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헌법과 법률을 구체적인 사건에서 집행하는 양심적인 판사의 판결을 기대하면서 사용자의 임금체불·정리해고 등에 대해 법원을 찾고 있건만 이런 노동자의 기대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의 재판거래의 증거라고 이 ‘말씀 자료’가 밝혀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재판거래를 하지 않는 법원에서는 이제 국가경제 발전과 정부 노동정책에 부합하기 위해 노동자권리를 짓밟는 판결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재판거래 증거가 아니라고 하는 그들의 변명이 오히려 무섭다. 재판거래 없이도 이 나라 판사들은 국가경제 발전과 정부 노동정책을 위해서 신의칙 법리를 통해 과거 임금청구를 부정하고, 용역 도급계약이라며 근로자지위를 인정치 않으며, 사용자가 수월하게 정리해고할 수 있도록 그 요건을 완화하는 등의 판결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면 나는 판결문에서 이유를 읽는 게 정말 끔찍할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 (재판거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재판을 한 대법관을 비롯한 법관들에게 심한 모욕이 될 것”이라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읽으면서 다시 곰곰이 이 나라에서 수많은 노동사건 판결들의 이유를 생각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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