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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무하 스타일, <지스몽다>

1894년 파리의 크리스마스.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기 위해 떠난 사람들 때문에 파리 시내는 텅 빈 듯했다. 쓸쓸함을 더하듯 진눈깨비 섞인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 고독 한가운데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년)가 있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고향인 체코로 돌아가는 대신 난로와 오르간, 이젤과 종이 뭉치들이 가득한 화실에 남아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굳이 가족을 볼 낯도 없었다. 순수회화를 배우겠다며 프랑스까지 유학을 왔지만 공부는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삽화가로서 근근이 생활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누구나 알아볼 만한 유명한 작품이 한 점도 없었다.

마침 친구인 카다르가 부탁한 일도 있었다. 카다르는 교정쇄를 보러 르메르시에 인쇄소에 가야 했는데, 하필 크리스마스 연휴와 일정이 겹쳐 곤란에 처한 상황이었다. 무하는 카다르의 고민을 두말없이 해결해 줬다. 고향에 간 카다르 대신 크리스마스 당일 내내 인쇄소에서 보낸 무하는 그 다음날도 남은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르메르시에 인쇄소에 있었다.

이때 인쇄소 매니저 모리스 드 브뤼노프가 다급히 사무실로 들어왔다. 르메르시에 인쇄소는 인쇄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인쇄 관련 디자인을 하는 일종의 그래픽디자인 회사였는데, 하필 크리스마스이브 오후에 르메르시에의 디자인이 고객에게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퇴짜를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스 최고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그녀는 연극 <지스몽다>의 감독 겸 주연을 맡고 있었는데, 르메르시에가 제작한 <지스몽다> 포스터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했던 것이다. <지스몽다> 개막일은 1895년 1월4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하필 르메르시에 소속 아티스트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로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안절부절못하던 브뤼노프의 눈에 무하의 모습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무심히 카다르의 시험쇄를 살펴보고 있던 무하에게 브뤼노프는 다짜고짜 석판화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무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해 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브뤼노프는 바로 무하에게 <지스몽다> 포스터 테스트 버전 작업을 맡겼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무하는 즉시 연미복을 빌려 입고 머리에 잘 맞지도 않는 실크해트까지 얻어 쓰고는 극장에 달려가 <지스몽다> 리허설을 하고 있는 베르나르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이렇게 완성한 그림을 본 브뤼노프는 <지스몽다> 포스터 작업을 무하에게 일임하고 휴가를 떠났다. 무하의 능력을 신뢰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마침내 12월30일 휴가에서 돌아온 브뤼노프는 무하가 완성한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엔 세로로 어마어마하게 긴 포스터가 쥐어져 있었다. 무하는 무려 ‘실물크기’로 포스터를 제작했던 것이다. 브뤼노프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평소에 제작하던 포스터와 비교해 규격과 그림 스타일이 완전히 딴판인 희한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제작할 수도 없었다. 당장 포스터를 보여 주기 위해 베르나르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 돼 있었다. 차마 맨손으로 베르나르를 만날 용기가 없었던 브뤼노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무하의 포스터를 들고 베르나르를 찾아갔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베르나르는 당장 그와 계약을 맺고 다른 작품도 맡기고 싶어 할 정도로, 무하가 그린 포스터를 마음에 들어 했다. 과연 베르나르의 안목은 정확했다.

알폰스 무하, <지스몽다>, 채색석판화, 1894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파크사우스갤러리.

1895년 새해 첫날 파리의 광고 선전탑에 <지스몽다> 포스터가 나붙었다. 포스터가 붙자마자 곧 파란이 일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이국적이면서도 신비로운 포스터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시선을 완전히 홀렸던 것이다. <지스몽다> 포스터를 손에 넣기 위해 포스터 붙이는 사람에게 몰래 돈을 쥐어 주는 사람도 있었고, 벽면에 부착돼 있던 포스터를 인적이 뜸한 한밤중에 면도칼로 몰래 떼어내 가져가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작가 제롬 두세가 잡지 <르뷔 일뤼스트레>에 밝힌 대로였다. “이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시민들에게 무하의 이름을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스몽다>는 도대체 어떤 작품이었기에 일개 무명 삽화가였던 무하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을까. 빅토리앵 사르두가 쓴 <지스몽다>는 15세기 중반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대공(大公) 부인 지스몽다와 평민 알메리오가 사랑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무하는 작품을 보고 바로 그리스정교회, 즉 비잔틴(Byzantine)을 떠올렸다. 정교회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체코 동부 모라비아지방에서 자란 무하에게 비진탄식 의상과 무대, 음악은 매우 친숙했다. 곧바로 무하는 연극에서 느낀 감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재현했다. 포스터 중앙에 아름다운 화관과 호화로운 옷을 길게 늘어뜨려 입은 베르나르를 세우고 그녀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들렸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머리 위로 그녀의 이름이 쓰인 아치를 후광처럼 세우고 바로 아래엔 동방정교회 십자가를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로 새겼다. 그리고 원색 대신 파스텔 톤의 투명한 색채와 명암으로 포스터를 채웠다. 무하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익히 봤던 ‘스테인드글라스’의 파스텔 톤 빛이 ‘신비감’을 더해 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스몽다>는 전혀 종교적인 내용의 연극이 아님에도 포스터 덕에 교회의 성녀상이 자아내던 성스럽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이렇듯 종교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무하의 작품은 파리 시민들에게 ‘익숙하지만 왠지 낯선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르 스틸 뮈샤(Le Style Mucha, 무하 스타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베르나르는 서둘러 포스터 디자인뿐 아니라 그녀 소유의 르네상스극장과 무대장치, 의상 장식품까지 디자인할 수 있는 6년간(1895~1900년)의 계약을 무하와 체결했다. 무하가 참여한 연극은 6년 동안 끊임없이 르네상스극장 연극무대에 올랐고, 거침없이 흥행했다. 연극이 끝나도 감동이 가시지 않은 관람객들은 무하가 디자인한 보석과 의상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무하는 가파르게 성공 궤도에 올라섰다. 순수미술에 비해 ‘이류미술’로 폄하됐던 포스터·장식작품 같은 실용미술에서도 회화와 다름없는 예술성을 추구했기에 가능했던 성공이었다.

무하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을 계몽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일하러 가는 그들은 멈춰 서서 포스터를 보게 될 것이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바란다.”

현재 무하는 실용미술을 순수미술의 단계로 끌어올린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 무하는 이 같은 평가를 가슴에 단 훈장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만 같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이유리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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