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자이언트 바바는 1960년대 일본 프로레슬러다. 바바는 레슬링을 하기 전 야구를 했다. 키 2미터9센티미터, 발 크기 320밀리미터였던 그는 어린 시절 발에 맞는 야구화를 구할 수 없어서 어머니가 직접 만든 신발을 신고 운동을 했다. 훗날 그가 유명 레슬러가 된 뒤 한 기자가 “어머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하고 물었다. 바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생을 한 건 그 신발을 신어야 했던 나예요.”

바바의 대답이 웃자고 한 농이었는지, 감사와 고생은 별개 문제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 어머니의 수고로운 노동만이 짐작 가능하다.

유명 수제화업체 노동자들이 회사를 점거하고 십수 일째 농성했다. 탠디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시간과 땀으로 만들어진 신발은 평균 15만~30만원이다. 비싼 것은 270만원 상당의 상품으로 시장에서 거래된다. 반면 노동자들이 받는 공임은 8년째 한 켤레에 6천500원 제자리 수준이다.

탠디의 구두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경력은 30년 이상이다. 모르긴 몰라도 회사는 ‘구두 장인이 한 땀 한 땀 떠서 만든 수제품’이라고 홍보하며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을 터. 레슬러의 어머니가 만든 신발에는 아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라도 담겨 있지만 노동자들의 생산물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닳아서 없어진 손가락 지문뿐이다. 자신이 만든 상품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상실하게 되는 현실, 200년 전 태어난 마르크스가 이 현장을 목도한다면 ‘이것이 바로 소외된 노동,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당연한 공임 인상 요구에 사측은 언제나 그렇듯 “업황이 어렵고, 회사도 힘들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임금이 동결되는 그 기간 두 배 이상 늘어난 영업이익, 회장과 그의 가족이 챙긴 100억원대 배당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게 다가 아니다. 이윤을 향한 사용자의 착취는 끝이 없다. 탠디는 제화 노동자들을 2000년 2월 일괄해서 개인 사업자로 등록하도록 했다. 퇴직금은 사라지고 4대 보험도 없어졌지만 이전과 하던 일·시스템은 똑같았다.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빼앗긴 것이다. 이 대목은 아마 ‘소외론’을 얘기한 마르크스도 예상치 못했을 터다. 세상에 계급에서 소외된 노동자라니! 2016년 개인사업자인 ‘노동자’들은 탠디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했고 법원은 ‘노동자’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사용자는 하청업체라는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이윤을 지켜 나간다.

의아한 점은 이런 일들이 숨겨지고 감춰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016년 법원 판결을 전후해 탠디 노동자들의 삶이 언론에 보도되고 잠깐이나마 사회의 관심을 받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추측건대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무노조·반노조 기업인 삼성이 치외법권에서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본 우리 사회 수많은 작은 삼성들은 ‘그래도 되나 보다’는 생각으로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아무렇지 않게 불법과 탈법을 자행했을 것이다. 정부도 나서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돕겠다는 판에 어떤 거리낌이 있었으랴.

세상이 제자리를 찾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꼭 1년이 됐다. 지난 1년은 ‘노동존중 사회’로 가기 위한 정부 의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2년차로 접어드는 지금, 노동존중 사회의 울타리에는 법이 닿지 못하는 곳도,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도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과 정부가 보인 높은 의지가 굳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의지를 따라오지 못하는 실천은 바바의 야구화처럼 ‘고맙지만 고통스러운 신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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