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길 영화산업노조 수석부위원장

방송스태프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제작형태가 비슷한 영화제작 현장과 자주 비교된다. 방송제작 현장과 달리 영화노동자 노동환경이 ‘영화산업 표준근로계약서’ 보급으로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노동자 노동환경 개선은 영화산업에 표준근로계약서 사용·보급을 약속한 ‘대한민국 영화산업 발전 및 영화근로자의 고용과 복지 증진을 위한 노사정 이행협약’ 체결과 이행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행협약에 참여한 영화진흥위원회와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2월 이후 지금까지 자율적 협약이라는 이유로 실행을 기피하고 있다. 협약을 파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산업 노사는 2017년 2월24일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라 시급제를 도입하는 ‘2017년 표준근로계약서’를 마련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노사정 이행협약에 따라 문체부와 영화진흥위에 게시해 보급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문체부와 영화진흥위는 포괄임금제를 담은 ‘2015년 표준근로계약서’를 현재까지 그대로 게시하고 있다. 심각한 것은 영화발전기금과 국고로 운영되는 영화진흥사업 지원대상작을 선정할 때 ‘2015년 표준근로계약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진흥위는 영화 제작지원이나 유통지원, 투자·출자할 영화를 공모하면서 서류 중 하나로 ‘전 스태프 표준근로계약서 사본 제출’을 요구한다.

지난해 6월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촬영 중 감독이 돌연 하차하면서, 스태프의 불공정계약 정황이 드러났다. <자전차왕 엄복동> 스태프는 2015년 포괄임금용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면서 이미 폐기된 2015년 임금·단체협약을 적용받았다. 계약서에는 즉시 해고 조항이 담겼고, 약속된 시간보다 더 일하더라도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약정이 들어갔다. 이렇게 문제 많은 계약서를 표준근로계약서인 양 사용했다. <자전차왕 엄복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앞에선 표준계약서라는 이름을 걸고 뒤에선 계약조건을 저하시키는 이면합의서를 작성하는 사례가 다수 있었다.

노조는 2015년 표준근로계약서 중 포괄임금 조항이 부적절하게 사용돼 영화노동자가 일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꾸준하게 알렸다. 이런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을 문체부가 새롭게 개선한 2017년 표준근로계약서를 왜 게시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노조는 문체부에 2017년 표준근로계약서 게시를 요구하는 소송을 하고 있다. 소송의 핵심은 노사정 합의에서 정부 역할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이어 가려 한다면 지금이라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문체부는 협약체결 당사자로 노사정 이행협약을 방치한 것에 대해 영화노동자들에게 사과하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따라 이미 실효된 2015년 단협에 의해 마련된 2015년 표준근로계약서를 폐기하라. 당장 개정된 2017년 표준근로계약서를 게시하고 배포하라.

노동자가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노사정이 만든 계약서가 현장에서 적용되게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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