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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상
   
▲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한때 주말마다 궁궐 탐사를 다닌 적이 있다.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조선궁궐의 정전(正殿)이다. 궁궐에 가면 늘 관람객이 몰려 서 있다. 문화해설사도 여기서 가장 열심히 설명한다. 관광객들은 밖에 서서 근정전과 인정전 내부를 보려고 고개를 길게 빼지만 어두운 정전(正殿) 안쪽엔 용상과 일월오악도가 흐릿하게 걸려 있다. 외국 관광객들은 감탄하지만, 내겐 왠지 그로테스크했다. 현실감 떨어지는 상상화로만 채워진 루브르 박물관의 14세기 이전 성화(聖畵)처럼 지루했다.

근정전과 인정전은 국왕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사신 접견 등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그동안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했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은 궁궐에 오면 왕과 왕비의 공간에만 집중한다. 일종의 팬덤 현상처럼 관광객들은 지체 높은 이들의 공간에 관음증을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봄날의 경회루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한꺼번에 1천명이 앉아 밥과 술을 먹었다는 경회루를 볼 때마다 족히 3층 높이 되는 누각 위로 술상을 어떻게 올렸을까 궁금했다. 술상 올리느라 무수리들이 죽도록 고생했겠다 싶었다.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은 경회루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도 궁금했다. 창덕궁도 비원 같은 화려한 정원보다는 굽어 있는 오솔길을 걷는 게 좋다. 하급관리와 기술직 중인·궁녀·무수리들의 공간에 더 주목하면서 궁궐을 걷는 건 또 다른 맛이다.

문화재청이 발조차 들여놓지 못했던 창덕궁 인정전 내부를 4월부터 개방한다(경향신문 3월28일자 23면). 목·금·토요일 하루 4회만 제한적으로 개방한다. 언론이 높은 양반들 공간보다는 낮은 곳에 관심을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지난해 말 드라마 <화유기> 스태프가 세트장 천장에서 위험천만한 작업을 하다 추락해 중상을 입자 여기저기서 열악한 방송산업 비정규직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화유기>도 이한빛 조연출을 죽음으로 내몬 <혼술남녀>도 모두 CJ E&M 자본으로 제작됐다.

CJ E&M이 28일 215명 정규직 전환과 56명 신규채용 등을 담은 ‘방송산업 상생방안’을 발표하자 여러 언론이 다음날 일제히 보도했다. 연매출 1조5천억원에 당기순이익만 해마다 500억~600억원을 남기는 거대 미디어회사가 고작 215명을 정규직 전환하겠다는 발표를 친절하게 소개하는 게 언론 역할은 아니다.

조선일보의 29일자 14면 <맹모삼천지‘미’>란 제목의 기사도 국민과 별 상관없다. 미세먼지 공포를 피해 이삿짐을 싸는 엄마들이 공기 좋은 시골에 주말용 ‘세컨드 하우스’를 찾는다는 걸 소개해서 뭘 얻자는 건지. 세컨드 하우스 살 형편이 안 되는 대부분 국민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 말고는 다른 효과는 없을 듯하다.

동아일보가 28일자 12면에 쓴 <KDI “중학교 자유학기제 사교육비 늘렸다”>는 기사도 고소득층 시각에서만 맞는 말이다. 자유학기제는 중학생에게 한 학기 동안 시험 없이 체험활동 비중을 높여 자유롭게 진로를 탐색하는 제도로 2016년부터 전면 실시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자유학기제 전후 중학생의 사교육비 변화를 조사했더니 월수입 600만원 이상 가구에서는 연간 사교육비가 179만원 늘었고, 600만원 미만 가정에선 연간 24만원 감소했다고 나왔다.

보통 사람들(월수입 600만원 미만)에겐 자유학기제가 사교육비 절감 효과를 냈다. 동아일보가 문제제기한 사교육비 양극화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자유학기제 때문에 양극화가 심화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처럼 기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도 방향이 극명하게 갈린다. 어디에 서서 보도할지는 기자 개인의 몫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이정호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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