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죽음으로 유지되는 방송이 과연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2017년 사망한 이한빛 PD는 유서에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 가긴 어려웠어요”라고 남겼다.

방송계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몇 달 뒤 <다큐프라임-야수와 방주>를 제작하던 박환성·김광일 PD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로그램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빠듯한 제작비 때문에 야간에도 강행군을 하고, 스스로 운전대를 잡아야 했던 외주제작 PD의 현실을 보여 준 것이다.

정부도 방송계의 심각한 현실을 인식했다. 지난해 12월19일 관련부처들이 모여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계약서 자체가 없거나 불공정한 관행이 지속되는 것, 그리고 심각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의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도입한 ‘외주제작 의무편성제도’는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비용을 떠넘기는 방편이 됐고, 소위 ‘프리랜서’라는 계약형식은 노동자들을 쉽게 쓰고 자르는 도구가 됐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 무권리 상태 노동자, 이것이 지금 방송사 현실이며 정부는 이 현실을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부 개선대책은 현실에서 매우 무력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SBS의 시사프로그램 <뉴스토리> 작가 해고다. SBS는 ‘센’ 시사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뉴스토리>에서 일하던 작가들을 해고했다. SBS가 내세운 근거는 바로 위 종합대책으로 만든 ‘표준계약서’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방송사와 작가 간 권리와 의무관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방송작가 집필표준계약서’를 제정하고 의무화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SBS는 표준계약서에서 방송사에 불리한 조항은 삭제하고 일방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조항을 집어넣은 계약서를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작가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SBS는 그 계약서에 근거해 작가들을 해고해 버렸다.

그럴듯한 정부 대책이 현장으로 내려가는 순간 왜 이렇게 왜곡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법적 강제력 없이 방송사 선의에 의존하는 대책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평가 항목에 외주제작 노동자들의 권리를 담거나, 인권선언문을 만들어 이의 준수 여부를 방송사 재허가 조건으로 담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개선하기에는 부족하다.

SBS가 표준계약서를 자신들 마음대로 바꿔서 노동자들에게 강요해도 처벌받지 않고, 노동자들이 왜곡된 표준계약서를 거부할 권한이 없고, 그렇게 해고됐다 하더라도 다시 구제할 방안이 없다면 방송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꿀 도리가 없다.

그러니 정말로 방송계 관행을 바꾸고 방송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법적 강제력을 부여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고, 말도 안 되는 제작비를 주지 못하게 하고,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게 하려면 방송계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한 뒤 이를 어기는 사업주를 제대로 처벌해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외주제작사를 근로감독 대상에 포함해 근로점검을 하고, 근로환경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그때 책임주체는 외주제작사만이 아니라 방송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원청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관련부처들이 해야 할 일은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잘못된 관행이 발생하면 반드시 고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잘못된 관행을 고발한 방송계 노동자들이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용기 있게 나선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현장은 바뀌지 않는다.

SBS에서는 이제 <뉴스토리>에서 해고된 작가들이 요구한 대로 ‘표준계약서’를 고치지 않고 계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들의 용기가 현장을 바꾼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해고된 작가들이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관련부처들이 나서 해고된 작가들이 다시 돌아가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방송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방송통신위와 문체부, 노동부의 진정성 있는 역할을 기대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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