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 헌법 1조는 날 선 무기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시절 얼떨결에 팔뚝질을 하며 헌법 1조를 외쳤던 기억이 난다. 헌법 1조는 내 안으로 들어왔고, 내내 입속말로 웅얼거릴 정도였다. 심지어 헌법 1조는 노랫가락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뚝질과 함께 부르는 운동가요 가사의 일부였다. 입에서 입으로 퍼진 노랫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화살이 됐다. 정권교체 밀알이었다.

이처럼 헌법이 모든 이들의 피부에 와 닿은 적은 없었다. 국민은 선언적인 헌법 1조의 주권재민 조항이 현실화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런 분위기에 정치권이 화답한 것일까. 여야 모두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를 거론하며 헌법 개정을 약속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은 개헌으로 새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겠다고 약속했다. 개헌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대통령 선거 당시 모든 후보들은 개헌일정을 내놓았다. 2018년 6월 지방선거일 그날이다.

그런데 헌법 개정에 한목소리였던 정치권이 둘로 쪼개졌다. 22일 청와대가 사흘에 걸친 ‘대통령 개헌안’ 설명을 마치고 난 뒤 벌어진 상황이다. 대통령 개헌안에 찬반양론이 나온다. 일각에선 “멀쩡한 헌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것”이라며 대통령 개헌안을 비판한다. 차라리 헌법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개헌 반대파 목소리다.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렇다면 헌법은 왜 개정해야 할까. 현재로선 대통령 개헌안을 낸 청와대가 가장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번 개헌은 첫째도 둘째도 국민 중심 개헌이어야 한다”며 “기본권을 확대해 국민의 자유와 안전, 삶의 질을 보장하고, 국민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의 개헌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 개헌안은 종전보다 노동의 지평을 넓혔을 뿐 아니라 개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군사독재 시절 악용된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한 것이나 노동조건 결정에서 ‘노사 대등결정 원칙’을 명시한 것은 진일보한 것이다. 국가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지급노력과 ‘일과 생활의 균형’ 의무를 부과한 것은 시대 흐름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공무원 노동 3권을 인정한 것은 노동권 정상화 조치다. 또 대통령 개헌안에는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개선과 권익보호를 위해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종전에 근로조건 향상에 국한했던 단체행동권을 다소나마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셈이다.

이를 보면 1987년 9차 개헌 이래 30년 동안 유지된 헌법은 낡을 대로 낡았다. 노동을 경시하고, 규제 대상으로 본다. 헌법을 뜯어고쳐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청와대는 대통령 개헌안에서 노동기본권을 강화했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화하고, 전체 노동시장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최근 현실과 대통령 개헌안이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대통령 개헌안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지급이 '원칙'이 아니라 '노력의무'로 명시한 것만 봐도 그렇다. 상시·지속업무의 직접고용 원칙 명시는 아예 빠졌다. 정규직-비정규직 임금격차를 해소하는 데 미흡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 남용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적어도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개헌안으로 여기기에 미흡하다. 노동에 관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데에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대통령 개헌안에 반영된 일부 노동권 조항을 두고 사회주의 개헌안이라고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지 말고 야당들도 개헌안을 제시하고 국회에서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더 이상 개헌 논의를 미루거나 봉쇄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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