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

최근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조차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갑작스럽게 입법예고됐다. 입법예고 전에 으레 거치는 전문가·노사단체 의견수렴 절차 없이 졸속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면개정에 따른 시행령·시행규칙 등 하위법령 개정안이 입법예고된 이후인 현재까지 초안조차 만들어지지 않다는 점이다. 관계공무원들이 과연 제정신인지 묻고 싶다.

이번 사건은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공무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산업안전보건법을 공무원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법 개정을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

모름지기 법률을 전부개정하려면 선행적으로 전문가를 대상으로 TF를 구성하고 많은 사람들의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하는 것이 관례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개정 내용의 품질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법과 같이 전문적이고 복잡한 성격의 법률은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 절차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 밀실에서 전부개정안을 마련하고, 이렇게 마련된 전부개정안에 대해 사안별로든 전체적으로든 입법예고 전에 간담회·공청회 등을 단 한 차례도 거치지 않은 것은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령을 일부 개정할 때도 입법예고 전에 통상적으로 학계·노사단체 등 관계단체 간담회를 한다. 의견수렴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행정이 거꾸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노동계·경영계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다.

절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용 면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논리적 기준이나 체계적 정합성 없이 조문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해 놓았고 노동자 개념을 확대하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용어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법리를 면밀히 따지지 않고 무작정 기업 의무 확대와 처벌 강화를 하다 보니 헌법의 일반원칙에 위배되는 조항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게다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됐던 도급인 의무는 오히려 약화시켰다. 개정안대로라면 공장 유지·보수작업에 대한 도급인 의무는 사라지게 된다. 발주자 의무는 신설됐지만 핵심 내용은 빠져 있다. 그리고 개정안이 기업 현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지 고민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졸속 추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딱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전부개정안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고 있다.

기존 법률의 조문순서까지 바꾸는 전부개정은 그동안 축적된 관련 판례·법리·실무관행 등을 상당히 허물고 법에 대한 이해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전부개정을 할 때 충분한 의견수렴과 논의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1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은 장차관 워크숍에서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섬세하게 살피면서 모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며 “충분한 설득과 공감의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공론화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책 수요자인 국민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는 과정이 충실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연구용역을 맡기거나 형식적인 토론회만으로 여론수렴 절차를 마무리하는 기존 관행을 타파할 것을 역설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부가 보여 준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절차는 대통령의 이러한 주문사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겠다는 태도다. 대통령 주문사항을 떠나 실질적인 의견수렴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고 결과의 타당성·수용도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지금부터라도 전부개정안을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는 생각으로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칠 것을 당부한다. 법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잘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선’이 아니라 ‘개악’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앞으로도 의견수렴 절차를 요식행위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훗날 ‘적폐’로 평가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