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근로기준법 ‘개악’ 논란이 있었다. 대체적인 평가는 노동계가 원하는 만큼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성과와 개선이 많았다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있는 싸움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100% 할 수 없는 게 세상사다. 계급 대 계급의 이해관계가 세력들의 힘을 바탕으로 첨예하게 부딪히는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됐다고, 판 전체를 뒤엎는 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접근법이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성과로 이뤄 낸 것을 아끼며 갈고닦아 내일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실패하거나 이루지 못한 것을 물고 늘어지면서 이미 지나간 어제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패한 걸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미래 지향적인 논의는 부실하거나 부재하다.

2017년 최저임금 인상 평가를 둘러싼 노동운동 내부 논란이 대표적이다. 조합원들의 엄청난 수고를 통해 좋은 열매를 맺어 놓고서는, 처음에 원하던 최고 품질이 아니라며 잘못되고 실패해서 미안하다는 성명을 내놓으며 최저임금 노동자들을 실망스럽게 했다. 경험과 실력이 모자란 아마추어 선수에게 42.195킬로미터 풀코스 마라톤을 2시간대에 들어와야 한다는 목표를 던진 감독이, 그 아마추어 선수가 3시간대에 완주를 마쳤다고 화를 내면서 이런 대회는 참가할 필요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주장이 100% 옳다는 것과 우리의 주장이 100% 관철되는 것은 차원과 수준이 전혀 다른 문제다. 도덕과 현실을 뒤섞고, 당위와 정세를 혼동하는 것은 관념론이다. 노동운동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도덕과 당위에 맞는 이념과 노선을 지향하되,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현실에 적합한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야 한다.

통상임금과 최저임금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임금 일반으로서 가지는 공통점은 무엇인지와, 적용 대상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내용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입장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최저임금에 대한 2018년 노동운동의 원칙은 2017년에 이룬 성과를 계승하고 투쟁의 탄력(momentum)을 유지하는 것이다. 2018년 최저임금 투쟁에서 조직노동이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2천만 노동계급의 대변자가 되려 한다면, 일부 조합원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벗어나 계급적 시야와 전국적 전망을 갖고 문제를 조망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계급적 시야와 전국적 전망이란 무엇인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200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에만 매몰되는 ‘경제적 조합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 전국 중앙조직(national center)의 기능과 역할이 중요하다. 최저임금 체계와 구성의 변화는 경제발전과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시대적 과제다.

국가와 자본은 자기 입맛에 맞는 방안을 중구난방으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 맞선 조직노동의 대안은 무엇인가. 20년 전 기준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는 수구적 태도를 고집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 시대 상황과 경제 수준에 맞는 실사구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인가. 여기서 노동운동의 원칙은 분명하다. 2천만 노동계급의 상당수를 구성하는 중소·영세·무노조 사업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대통령의 시간”이란 표현을 썼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하지만 대통령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적 환경과 시대적 여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개혁에 나설 수 있는 물리적 시간과 권력 자원은 유한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필자는 박근혜 때도 노동운동이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회적 대화에서 핵심은 ‘화(話)’가 아니라 ‘대(對)’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것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끼리만 모여 우리끼리만 알아듣는 주장만 반복하지 말고, 자본과 국가에 맞서 돌직구를 날려야 한다.

꽁꽁 숨기려는 정보를 찾아내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고(협의), 이를 바탕으로 전체 판세를 조직노동만의 유리함이 아닌 전체 노동계급에 불리하지 않게 이끌어 가는 것(교섭)이 사회적 대화다. 이렇게 자본과 국가에 맞서려면 경험과 능력이 필요하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공약한 “실력 있는 민주노총”과 “당당한 교섭”도 이런 접근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본다.

계급투쟁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실력은 ‘동네 축구’ 수준이다. 동네 축구의 가장 큰 특징은 선수들이 공만 따라 우우 몰려다니는 것이다. 축구 실력이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맡게 되는, 골키퍼만 골대를 지키며 전체 판을 지켜볼 뿐이다. 팀워크가 뭔지 모르는 10명은 모두 공격수가 된다. 상대편 선수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축구공만 쫓는다. 경기는 늘 ‘all or nothing’ 분위기로 진행되고, 노동운동팀은 대체로 ‘nothing’을 손에 쥔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은 축구공이다. 노동운동 시선에서 공을 놓쳐서는 안 되지만, 그게 골대를 내버려 둔 채 모든 선수가 공을 쫓아 몰려가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한두 골 내줬다고 경기에서 진 것도 아니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에서 노동운동 맘대로 안 됐다고 판을 깨겠다는 발상은 한두 골 먹었다고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화를 포기하겠다는 발상은 계급투쟁을 포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태도와 관행을 두고 한국 노동운동사는 전투적 경제주의(militant economism)라는 역사적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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