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1987년 이후 민주노조가 분출하면서, 사용자 ‘위장폐업’이 빈발하던 때가 있었다. 1989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88년 휴·폐업사업체 실태’에 따르면 1988년 한 해만 1천37개 업체가 휴·폐업해 4만2천930명의 노동자가 해고될 정도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비정규 노동자의 노조 결성이 활발해지면서, 이에 대해 원·하청 자본이 마치 매뉴얼처럼 조합원이 속한 하청업체의 계약을 해지하고 잇따른 하청업체 폐업을 주도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정권에서 기업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기업 이익과 자산을 지배주주 내지 ‘총수일가’ 이익을 위해 빼돌리는 행태가 재벌부터 중소기업까지 만연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기업이 부실해지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있건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구조조정은 경영자의 전권이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

이미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고도 지난해 11월12일부터 다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사례는, 빈껍데기 회사의 ‘위장설립’이라는 새로운 부당노동행위 유형을 보여 주고 있다.

파인텍 노동자들의 원래 일터는 한국합섬이다. 한때 1천300여명 직원을 거느렸던 한국합섬은 2006년 정리해고 통보와 공장 가동중단을 자행했으나 노조 투쟁으로 정리해고 철회와 공장 정상화에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합섬은 합의를 깨고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이후 5년간 조합원들이 빈 공장을 지키며 정상화를 위해 싸웠다.

2010년 평가액 870억원이던 한국합섬은 스타플렉스에 399억원에 매각됐는데, 이런 헐값매각이 정당화된 것은 스타플렉스가 노동자들의 고용·단체협약을 승계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플렉스는 스타케미칼로 사명을 바꾼 지 3년도 안 지난 2013년 일방적으로 공장 가동중단을 선언하고 권고사직을 강요하며 이에 응하지 않은 조합원들을 해고했다. 결국 차광호 해복투 위원장의 408일간 고공농성 끝에, 2015년 사측은 법인 신설을 통한 고용승계, 노조 인정, 단체협약 체결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렇게 신설된 파인텍은 300평의 작은 공장을 임대해 조합원 8명만을 고용해 운영하다가, 2016년 다시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기계마저 철수시켰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10개월 동안 일하면서 받은 임금은 1천만원에 불과하며, 회사는 시장 수요가 있어도 인력을 충원하거나 연장근로를 시키지 않았고, 메인 기계는 제대로 가동조차 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파인텍은 경영이 어려워 어쩔 수 없다고 나자빠져 있고, 스타플렉스는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그러나 파인텍 대표이사는 스타케미칼 전무이사 출신이자 현재도 스타플렉스 사내이사를 맡고 있다. 스타플렉스 대표이사는 스타케미칼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2015년 신설법인 설립을 통한 고용·노조·단협 승계에 합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파인텍 설립은 노조 투쟁을 비켜 가기 위한 형식적 회사설립에 불과하고, 고용과 단협 승계 책임은 실질적 지배기업이라 할 스타플렉스에 있다고 다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노사관계에 개입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면서, 파인텍의 형식적 설립과 가동 중단에 스타플렉스 책임이 있는지에 관한 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지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인 스타플렉스와의 교섭 자리를 마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미 유럽연합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에서 법인의 형식적 구분을 뛰어넘어 기업집단 전체에 노동법상 책임을 지우는 입법을 하고 있다. 우리도 스타플렉스 사태를 계기로 삼아 기업의 법적 형식을 악용한 폐업·매각·신설 등에 관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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