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철수를 선언한 후 대응방안을 둘러싼 논의가 무성하다. 한국지엠은 국회에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제너럴 모터스(GM) 본사가 한국지엠에 빌려준 3조원가량을 출자전환할 테니 한국 정부가 산업은행을 통해 대략 1조원을 지원하라는 것이고, 세금감면 혜택을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정부는 한국지엠 경영정상화 지원을 위한 3대 원칙을 제시했다. 대주주의 책임 있는 역할, 주주·채권자·노조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고통분담,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한 경영정상화 방안 마련이다. 그리고 재무실사를 포함해 한국지엠 경영정상화 방안을 신속하게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협의 과정을 보면 정작 피해자들은 대상화되고 책임자들이 큰소리를 친다. ‘먹튀’ 가능성을 알면서도 대우자동차를 지엠에 헐값으로 팔아넘긴 정부,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산업은행, 고율의 이자로 지엠이 한국지엠을 수탈하도록 만든 경영진이 위기 해결의 주체인 양 나서고 피해자들은 대상화돼 있다. 한국지엠 협력업체들은 피해자지만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지원 대상이다. 한국지엠 노동자들은 심지어 이 사태의 책임자로 간주된다. 정부와 한국지엠 사측은 당당하게 노동자에게 양보를 요구한다. 노조를 협상 주체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피해자로도, 책임자로도 명명되지 않는다. 이미 피해를 덮어쓰고 있을 뿐이다. 군산공장에서 1천명이나 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말 최후로 남아 있던 비정규직 200명이 최종 해고통보를 받았다. 부평과 창원공장 비정규 노동자 100여명도 ‘인소싱’이라는 이름으로 새해 벽두에 해고됐다. 2018년 2월 법원은 "한국지엠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므로 정규직"이라고 인정했지만, 한국지엠은 정규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에 시달렸을 뿐 위기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던 비정규 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 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게 되면 정작 책임자들은 문제 해결을 회피하고, 잘못된 정책과 구조를 바꿀 기회는 사라진다. 이것은 이후 더 큰 위기로 다가온다. 우리는 이미 그 모습을 조선산업에서 봤다. 2009년 조선산업 위기 때 중소조선소가 폐업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잘못된 경영의 책임을 묻지 않다 보니 기업들은 무리하게 해양플랜트 저가수주경쟁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2014년 다시 위기를 불렀다. 또다시 정책과 경영 실패가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경영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장기적인 조선산업 발전전망 논의도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책임을 ‘하청노동자들’에게 떠넘긴 순간 기업을 제대로 통제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도 멈춰 버렸다.

똑같은 모습이 한국지엠에서 나타날까 우려한다. 비정규직을 우선 희생시키고, 정규직 일부를 강제 희망퇴직으로 정리한 후 일정 기간 지엠 공장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럴 경우 한국지엠에 대한 수탈을 가능하게 했던 왜곡된 소유구조와 잘못된 경영전략을 바꿀 기회를 잃게 된다. 정부도 ‘생존 가능한 정상화 방안’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쌍용자동차를 매각할 때처럼 노동자를 해고하는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혹은 비정규직을 해고함으로써 충격을 줄이는 방식에 동의할 수도 있다. 인력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넘기려고 하면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기업의 방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한국지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출하려면 ‘누군가를 희생해 나만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비정규직을 고용의 안전판으로 삼는 순간 한국지엠 정규직노조는 다가올 구조조정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 협력업체 노동자, 그리고 지역사회가 함께 방향을 논의하면서 정부와 협상해 나가야 한다. 그 출발은 비정규직 우선 해고를 멈추고, 비정규직노조를 중요한 협상 주체로 인정하도록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우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나서 ‘지엠 이후’를 준비하고, 그 주체의 폭과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지금 ‘함께’ 싸워야 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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