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숲 속에만 있으면 숲의 상태를 정확히 볼 수 없다. 숲 밖도 나가 봐야 한다. 바깥에 나가더라도,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도 봐야 한다. 옆과 뒤도 봐야 한다. 숲 속에서 볼 때도 눈으로만 봐서는 부족하다. 후각·청각·미각·촉각을 열어야 한다. 나무만 봐서도 안된다. 곤충·새·물·흙·균 등 나무에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봐야 한다. 뿌리·줄기·잎·열매·꽃도 봐야 하고, 사시사철 봐야 한다. 숲 바깥 환경을 조목조목 봐야 한다. 이처럼 세상을 본다는 것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격언이 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 담긴 내용이다. 삶이 쌓일수록 공감 가는 명언이다. 같은 시각·장소에서 같은 상황을 봐도 해석이 이렇게 다를까 싶을 때가 많다. 한데 재밌는 현상이 있다. 그 명제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인간 속성인데, 대개의 인간·집단이 자신은 잘 봤다고 전제한다. 자신만 제외하는 것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다 봤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운동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집합체인데, 그래서 일부분만 본 것일 수 있는데, 수시로 잘못 볼 수 있는 것인데, 언제나 다 잘 봤다는 듯 확신하며 행동한다. 그러면서 집착한다. 지금의 한국 운동 평균치가 그 상태다. 운동이 계급·계층에게 무시당하고 도태되는 이유다.

운동권 감별법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날마다 운동화에 배낭 메고 다니는 사람은 십중팔구 운동권이란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감별법에 따르면 운동권은 일상의 평범한 친구가 없다고 한다. 끼리끼리 논다는 지적이다. 웃어넘길 수 없는 얘기다.

한국 운동은 운동 경계 바깥의 대중과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넓게 만난다 해도 경계에 선 대중이다. 상황의 절박함이든 운동에 대한 공감이든 주장에 동의할 준비가 돼 있는 대중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중은 회원·조합원 등 경계 안의 대중이다. 주장에 익숙해 있어서,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대중이다. 그렇게 축소된 운동의 만남조차 중앙 단위로 갈수록 축소된다. 간부·활동가로 한정된다. 운동 관성에 익숙한 층이다. 이런 폭으로는 운동과 대중의 풍부한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렵다.

심각한 문제는 만남의 깊이다. 만남이 투쟁·실천의 당면 현안으로 한정된다. 그것이 대중의 의식·행동을 결정하기는 한다. 하나 그것 말고도 대중의 의식·행동을 결정하는 요소가 그들의 삶과 생활 속에 무척 많다. 그러나 운동은 파고들지 않는다.

운동이 노선과 관계 따위에 지나치게 속박돼 있기도 하다. 집중은 필요해도 속박되면 안 되는데 밥·일·술이 운동 속, 심지어 부문·정파 등의 우물 안에서만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우물 바깥의 변화 흐름을 생생하게 볼 수 없다. 분석하고 해석하는 운동 본능이 무뎌진다. 수용하고 혁신하는 능력도 무뎌진다. 기껏해야 언론을 통해 본 것과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정해진 논리체계에 끼워 맞추고 만다. 그리해도 어차피 우물에서 동질의 부류와만 어울리는 판이라 별로 불편하지 않다. 세상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할 운동을 둔감하게 만든다.

보는 것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장치가 집단학습이다. 그런데 한국 운동 평균치는 학습에 게으르다.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치면 세계 운동에서 한국운동이 최고를 다투지 않을까 싶다. 무식한 집단이다. 학습해도 편식을 한다. 자기 정파·부문, 당면 업무와 연관되지 않은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과 생활 형편에 대한 학습이 거의 전무하다. 그것이 대중의 의식·행동 방향을 결정하는데도 고민하지 않는다. 계급·민족·시민이라는 덩어리로만 학습한다. 몇천 원 밥값에 소심한 주변부 노동의 절박한 삶의 특성, 몇만 원 밥값도 호탕한 중심부노동의 여유로운 삶의 특성, 국내 가족여행 한 번 못 가는 가난한 처지에도 자가용을 끄는 심리현상, 해외 가족여행을 수시로 가면서도 쩔쩔매는 심리현상, 집 가진 중심부와 집 없는 주변부의 극심한 차이, 그것이 노동이든 환경이든 인권이든 통일이든 각각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세밀하게 알지 못한다.

운동은 종교가 아니다. 언젠가 계급이 떨쳐 일어날 거야, 민족이 승리할 거야, 시민이 깨어날 거야, 역사가 알아 줄 거야, 라면서 정신승리하는 계급종교·민족종교·시민종교·역사종교가 아니다. 그런다고 계급이 떨쳐 일어나지도, 민족이 승리하지도, 시민이 깨어나지도, 역사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성과를 만들지 못하면 계급도 민족도 시민도 역사도 운동의 희망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바뀐다.

운동이 세상을 잘못 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운동은 실제 세상을 잘못 예측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노동자계급이 체제전복으로 나서지 않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지불능력을 확보했다. 남한과 북조선의 체제 경쟁은 남한 우위로 굳어졌다. 남북 공히 탈북 때문에 고심하는 세상이 됐다. 시민사회에는 갈수록 차별·혐오·배제가 확산되고 있다.

운동이 세상을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민중운동이든 신뢰도와 영향력이 무척 낮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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