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제너럴 모터스(GM) 창업자 윌리엄 듀랜트와 대우그룹 창업자 김우중은 경영방식이 닮았다.

김우중 회장의 문어발 확장경영은 1970년 대우그룹을 일으킨 미국 섬유쿼터 확보를 위한 ‘밀어내기 수출’ 경험과 한국전쟁 때 대구 서문시장 신문팔이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70년 3월 처음 미국을 방문한 김우중은 친분이 있던 바이어에게 미국 정부가 한국과 대만에 섬유수입쿼터제(수입량 할당제)를 추진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김우중은 즉각 ‘선수출 후매출’이란 외상수출로 미국시장에 봉제물량을 쏟아 냈다. 예측은 맞았고 대우실업은 한국에 배정된 쿼터의 30%를 장악해 최대 섬유 수출업체로 부상했다. 이게 대우그룹을 결정적으로 일으켰다. 이런 외상수출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90년대 김 회장이 이머징마켓(신흥시장)에 과도하게 투자한 건 이 경험의 연장선이다.

대우그룹 세계경영론의 핵심은 ‘발 빠른 전개’였다. 이는 50년대 대구 서문시장에서 배웠다. 소년 김우중은 경쟁자가 걸을 때 뛰어가서 신문을 팔았다. 다음엔 빨리 팔려고 잔돈을 준비했다. 그 다음엔 뛰어가 신문을 나눠 주고 천천히 걸어오면서 수금했다.

기술력이 취약한 대우는 결국 확장 마케팅만 믿다가 비운을 맞았다. 대우는 자본력이 취약한 채로 내실을 다지기도 전에 급팽창했다. 김 회장은 서문시장에서 배운 빠른 전개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다. 김 회장이 구사한 편법과 변칙은 그가 자라온 환경, 제대로 된 감독자 없는 난장판에서 자연스레 몸에 뱄다.

지엠 창립자 윌리엄 듀랜트는 1900년 자기 공장 하나 없이 브랜드와 판매망만 가진 마차 제조업으로 미국을 석권했다. 듀랜트는 1904년 연 28대를 생산하던 미국 자동차회사 뷰익을 인수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어 4년 만에 8천여대 생산으로 급성장시켰다. 듀랜트는 1908년 지엠을 설립한 뒤 인수합병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 미국은 5천여개 자동차 제조사가 난립했다. 듀랜트는 올즈모빌·캐딜락·오클랜드(폰티악) 등을 연달아 인수한다. 듀랜트는 포드주의와 달리 여러 회사와 여러 브랜드를 거느린 문어발 확장을 즐겼다. 지나친 확장으로 재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1911년 지엠 이사회는 듀랜트를 강제로 퇴출시켰다.

듀랜트는 기술자 루이 셰브럴레이와 손잡고 1916년 화려하게 재기했다. 지엠 지분을 사들여 다시 최대 주주에 올랐다. 영광도 잠시 다시 무리한 확장을 하다 1920년 공황이 겹치자 모든 걸 잃고 자동차업계를 떠났다. 주가를 떠받치려고 여러 편법을 썼던 게 화근이었다. 말년에 뉴욕에서 볼링장을 운영하다 생을 마감했다.

듀랜트 이후 지엠을 중흥시킨 앨프리드 슬론은 “듀랜트는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아가라 폭포 꼭대기에서 모자로 폭포수를 멈추려는 것처럼 무모했다”고 회고했다.

초기에 엄청난 강점이던 듀랜트의 확장 경영은 1920년 공황이 닥치자 속수무책이었다. 45개 회사, 75개 공장을 둔 거대기업주 듀랜트는 관리에 소홀했고 판매대수 늘리는 데만 열중했다. 80년대와 90년대 김우중 회장을 보는 듯하다.

지엠은 대우차처럼 확장 경영만 하다가 빨간불이 켜지자 2013년 유럽시장 쉐보레 철수를 시작으로, 호주·태국·인도네시아 등 주요 신흥시장에서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엠은 지난해에도 유럽에서 오펠을 매각했고, 인도 철수를 결정했다. 지엠은 사업재편으로 비용을 줄이고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 먹거리에 집중하겠다지만 만시지탄이다.

지엠에 매달린다고 한국지엠이 살아날 것 같진 않다. 우리도 이참에 과감히 ‘국민차(volkswagen)’ 하나쯤 키울 자세로 지엠과 협상하면 어떨까.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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