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4개 문장으로 구성된 나이팅게일 선서 마지막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쩌면 간호사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들의 헌신을 당연시하는 사이에 그들이 누려야 할 천부 인권과 행복할 권리를 빼앗지는 않았을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질문에 떳떳하게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설을 앞두고 전해진 어느 간호사의 안타까운 죽음 소식은 그래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간호사의 죽음 원인이 '태움'이라는 조직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름조차 낯선 태움은 간호사 집단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조직문화다. 선배가 후배에게 업무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떠넘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노동 관행이다.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관행은 어느 직장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태움은 간호사 집단에서만 발견되는 직무 특수성이 있다.

간호사들은 24시간 운영되는 근무시스템에서 생명을 다루는 노동을 한다. 정신적 긴장감이 클 수밖에 없는 데다, 선배가 후배를 훈련시키는 도제식 방식이 관행이다. 도제식은 선배와 후배의 위계질서를 강화시켰다. 위계질서는 설사 선배가 강압적인 지시를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수용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태움의 근본 원인은 24시간으로 운영되는 근무시스템에 있다. 의료행위는 부득이 24시간 운영돼야 한다. 그래서 간호사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3교대가 일반적인 근무형태로 자리 잡았다. 교대근무는 인간 신체리듬을 파괴하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교대근무자에게 휴식을 보장하는 제도까지 꼼꼼히 챙기지 못했다. 그 결과 간호사는 세 가지 노동환경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불규칙한 교대근무와 높은 이직률, 장시간 노동이 악순환되는 고리다. 3교대 근무는 그 자체로 인간 신체에 부담을 준다. 3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의 절규는 하나같이 "생활이 다 깨진다"는 절규다.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려워지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도 내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여성이 3교대 근무를 감당할 만큼 복지시스템도 없다. 3교대를 하면서 정상적인 육아는 불가능하다. 간호사 이직률이 다른 직업보다 높은 이유다.

간호사의 높은 이직률은 다른 간호사의 휴식시간을 잡아먹어 버린다. 간호사가 이직하면 누군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이직했다고 돌보던 환자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규채용이 될 때까지 다른 동료가 자신의 휴일을 반납해야 한다. 근무패턴이 불규칙해질 수밖에 없다. 신규 간호사가 오더라도 최소 8주간 환자를 직접 돌보지 못한다. 비번조 선배가 쉬지 못하고 출근해 새내기 간호사 처치를 훈련해야 한다. 이직률이 높아 미숙련 간호사 많은 곳은 업무 인수인계 시간도 오래 걸린다. 보통 3년 이상 숙련된 간호사는 인수인계 시간이 20분 내외지만, 미숙련 간호사는 1시간씩 걸린다.

이런 노동환경에 처한 간호사가 나이팅게일 선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가 간호사에게 헌신을 기대한다면 사회는 그들에게 조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간호사에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노동강도를 줄이는 근무형태와 인원충원을 함께 지원해야 한다. 인원충원은 정부 몫이고 근무형태 개선은 노사 몫이다. 정부는 간호사 정원을 사실상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간호사 1명이 돌보는 환자가 선진국보다 많다. 인구 1천명당 간호사가 2015년 기준으로 5.9명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9.5명이다. 서울의료원이 노동시간단축 시범기관으로 선정돼 15명을 신규채용했는데, 이직률이 떨어지고 노동시간단축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5개 병동마다 1명씩 배치했을 뿐인데도 대체근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2주 이상 장기휴가까지 가능해져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간호사가 덜 바빠야 시민 건강도 꼼꼼하게 챙길 수 있다. 간호사수를 확대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에 속하는 일이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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