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8.9.20 목 13:04
상단여백
HOME 칼럼 연재칼럼 민변 노동위의 노변政담
353과 867, 그리고 4,000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향법)
   
▲ 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향법)

4천일.

햇수로 11년, 열한 번의 설과 추석이 지나가고 누군가의 24시간이 4천번 반복될 시간이지만 고 황유미씨에게는, 그 가족에게는 함께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간직하고 싶은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이 뒤엉켜 이미 흘러간 시간의 일부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함께 채워 나갈 수조차 없었던 기나긴 시간이다. 성분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화학물질에 매일 노출되고, 반도체 칩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고온·고압 환경을 방진복 하나로 견뎌야 했던 유미씨가 왜 아파야 했는지,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은 채 지나온 4천일이다. 그리고 2018년 3월6일, 유미씨의 11주기다.

867일.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구분이 희미해진 계절의 더위와 추위를 천막으로 견디며 세 번의 겨울과 세 번의 여름을 보내야 했던 시간. 삼성에서 일하다 아프게 된 노동자들, 가족과 동료들 곁을 떠나게 된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고 진정성을 갖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극히 원칙적인 요구를 위해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과 반올림은 867일째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반올림에 제보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피해 사례만 263명(2017년 10월 기준)이다. 263개의 삶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가족들의 삶이, 그들의 매 시간 매일의 일상이 파괴됐지만 이는 삼성전자의 영업실적으로, 반도체 신화로 모두 덮이고 만다. 무엇을 대가로 이뤄 낸 성과인지 돌이켜 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삼성은 직업병 관련 보도와 언론 기고에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하기에 급급하다. 자신들이 “아니다” 또는 “없다”고 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무소불위의 신의 경지에라도 이른 것처럼.

353일.

지난해 2월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구속됐다. 한 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됐지만, 이는 수많은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국정농단의 한 축이자 정경유착의 중심이던 삼성을 이끌고 있던 이재용은 뇌물공여·재산국외도피 등의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353일 만인 지난 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뇌물공여 혐의 중 일부, 재산국외도피 혐의 등에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삼성과 이재용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와 질책을 못 이긴 피해자로 둔갑했다. 언론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용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삼성의 ‘발전’과 ‘변화’를 기대한다는 헤드라인의 기사를 쏟아 냈다. 마치 353일간 부당하게 구속됐던 것처럼.

263개의 삶을, 867일의 시간을, 4천일의 일상을 부정하고 외면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들의 353일을 그토록 소중하고 억울하게 생각할 줄 안다면, 위험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삼성이, 지금의 이재용이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피해보상과 진정한 사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으로 더 이상 누군가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고 염치라는 것을.

오민애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민애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