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올해 운 좋게도 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을 더 깊게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요양 신청을 한 사례들 중 건설일용직·조리종사자·요양보호사·택배기사, 이사를 포함한 하역종사자 등 일부 업종에 대해서 업무관련성 평가를 위해 현장조사를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외래에서 신청인들의 직업력 조사와 증상 상담, 필요한 추가 검사를 하고 정형외과·신경외과·재활의학과 등 전문의들과 협진하고 일터로 직접 가서 그들의 노동과정을 살펴보며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고 이는 이후에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단자료가 된다. 더구나 비용은 산재보험에서 지불해 노동자들의 부담이 없으니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에게 이런 일은 그야말로 호사다.

이런 호사스런 업무를 하면서 자꾸만 떠올리는 단어는 ‘공감격차’다. 실험실에서 벗어나 노동현장을 누비며 노동자들의 고통과 건강문제를 조사해 드러내고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과학자 캐런 메싱의 회고록(지난해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번역됐다)에 등장하는 단어다. 과학자나 정책결정권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하루에 1천명의 아이들에게 먹일 밥을 짓고, 삽자루로 찬을 볶고, 천 개의 식판과 수십 대의 스테인리스 배식차를 윤이 나도록 닦고, 식당 바닥을 걸레질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팔꿈치 통증을 마주한 의사가 혹시 테니스를 치거나 배드민턴을 치지 않는지 물어보는 일이 그런 예라고 하겠다.

관절과 근육과 힘줄이 온통 긴장하는 노동의 현장을 제대로 접해 보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한여름 친지의 집들이를 위해 준비한 5킬로그램 남짓의 수박 2통을 양팔에 들고 아파트 단지를 헤매 본 경험 정도만 가진 나 같은 책상물림 전문가·행정가들에게 인력으로 다루는 25킬로그램·50킬로그램·80킬로그램은 실제로 체감하기 어려운 무게감이다. 5만원 남짓 경조사 비용의 현실감을 가진 노동자들이 수십억원의 횡령이니 비자금이니 하는 금액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형마트에서 2리터 생수통 6개 묶음(고작 12킬로그램)을 ‘으헙’ 기합을 넣어 들어서 담고 쇼핑카트 바퀴의 뻑뻑함을 불평하다가 운이 나쁘게도 마트 출구에서 주차장까지 생수 묶음을 들고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앞으로 생수는 택배다!’는 깨달음을 얻을지 모르지만, 매장의 그 많은 생수통 묶음을 4단 높이로 쌓아 두는 일은 누가 했을지 택배 배송원은 하루 몇백 킬로그램의 짐을 들고 몇백 계단을 오르내려야 할지는 떠올리지 않는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공감격차’가 나타나고 만다.

어깨의 회전근개질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일부 전문가들은 40·50대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질환을 산재로 인정하고 보상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40·50대의 ‘누구나’라는 환자들의 직업과 업무를 모두 물어봤다면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흡연을 하는 모두에게 폐암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비흡연자에게도 폐암은 발생하지만, 흡연자들에게서 폐암 위험이 훨씬 높다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로 힘을 쓰고 반복하는 부담작업이 많았던 이들에게 근골격계질환 위험은 높기 마련이다.

내 힘으로는 제대로 들고 가누지도 못하는 무게의 석재를 번쩍 들어 올려 한손으로 받치고 앵커드릴로 고정하는 노동자의 어깨 근육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농수산물시장에서 쏟아져 나온 20킬로그램이 넘는 당근이며 감자 수백 박스를 쉴 새 없이 담아 400킬로그램이 넘도록 손수레에 싣고 납품차량으로 옮기는 일을 새벽 2시부터 낮 2시까지 해야 하는 노동자의 온몸 관절과 힘줄은 속으로 앓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상을 업무상질병판정위 전문가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현장에 가서 동영상을 열심히 찍어 봐도 나중에 돌려보면 그들은 너무도 쉽게 중량물을 들어 올리고 일을 해치우는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 육체노동으로 단련됐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비해 높은 근력을 가졌고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자는 것은 정신노동으로 단련된 전문가들의 뇌가 모두 아인슈타인의 것과 같기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감격차’를 줄이고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봐야 보인다. 마트에서 생수통을 들면서, 현관문까지 배달된 20킬로그램 쌀자루를 들어 옮기면서, 구내식당에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으면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업무관련성 인정기준은 이렇게 현장을 들여다보고 인정기준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리급식 노동자의 팔꿈치질환, 형틀목공의 어깨 회전근개질환 등 직종에 따라서 당연 인정기준을 만들고, 근골격계질환 산재승인 과정의 행정적 비용과 당사자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지속적인 개선을 향해 가야 한다.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과 재활복귀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높아진 점은 고무적이다. 그래도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훨씬 더 중요한 ‘예방’까지 내다봐야 하기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