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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연줄’이 최고 스펙-공공기관 채용비리 대책을 읽으며
▲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갑자기 공정한 세상이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으아하다’고 할 때가 있다. 이 자본과 권력의 세상이 공평한 정의의 세상인 양 표정을 지으면 말이다. 29일도 그랬다. 문재인 정부는 이날 기획재정부가 주최한 관계부처 회의에서 공공기관 채용비리 점검 결과를 발표하고, ‘채용비리 특별점검 후속조치 및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채용비리 전수조사를 시작한 이후 내놓은 최종점검 결과였다. 275개 공공기관, 659개 지방공공기관, 256개 기타공직유관단체 등 1천190곳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채용비리 점검 결과 946곳에서 총 4천788개 지적사항을 적발했다. 정부는 부정청탁·지시 및 서류조작 등 채용비리 혐의가 짙은 109건을 수사의뢰하고 255건은 징계(문책)를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수사의뢰나 징계 대상에 포함된 현직 임직원은 197명이었다. 이 중 현직 직원 189명은 29일부터 즉시 업무에서 배제하고 향후 검찰 기소시 즉시 퇴출하기로 했다. 수사의뢰 대상에 포함된 공공기관 현직 기관장 8명은 즉시 해임을 추진하기로 했다. 29일 회의에서 관계부처 합동 발표문을 통해 정부는 이번 “후속조치 및 제도개선 방안은 공공기관 채용비리 근절의 마무리가 아닌 공정한 채용문화 정착을 위한 첫걸음”이고, “정부는 오늘 발표를 계기로 채용비리와 같은 특혜와 반칙이 우리 사회에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모든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관한 정부 조사 결과와 대책 소식을 읽자니 내가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거나, 적어도 공정한 세상을 지향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인가. 순간 내 생각을 의심했다. 그래서 뉴스를 검색했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3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사회 유력인사들의 청탁에 의해 비리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공공기관 채용비리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반칙과 특권의 상징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가장 공정해야 할 공공기관들이 우리 사회 공정성을 무너뜨린 한편 국민에게 실망감을, 청년에게 좌절과 배신감을 안겨 줬다”고 한 후, “전체 공공기관 전수조사를 해서라도 채용비리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 달라”며 “청탁자와 채용비리를 저지른 임직원에 대한 엄중한 민·형사 책임을 묻겠다”고 했고, “부정한 방법으로 채용된 당사자의 채용을 무효·취소하고 채용절차 투명성을 확보하는 법·제도 개선과 감독체계 강화도 하라”고 주문했다. 그 뒤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관해서 같은 취지로 조사와 대책을 주문해 왔다. 그러니 이번 발표는 철저히 문재인 대통령의 주문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촛불대선에서 “부정부패 없는 대한민국” “공정한 대한민국”을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책으로 공약하고, 이명박·박근혜 9년 집권의 적폐청산을 최우선 기치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니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대통령의 주문이고, 관계부처의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걸 두고서 나는 갑자기 의아하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생각이 비뚤어진 것인가.

2. 지난 금요일이었다. 은행 채용비리에 관한 취재 보도에 필요하다며 한 방송사 기자의 요청에 따라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내게 한 질문은 채용비리로 채용된 노동자를 채용 취소하게 될 경우에 발생할 노동법상 문제였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그 채용비리에 가담했으면 채용 취소는 해고로서 법원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채용 경위 등 구체적인 사정을 살펴 해고의 정당성을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채용비리로 채용된 자를 채용 취소하겠다는 정부 방침과 다른 입장으로 비치게 되지 않을까, 잠시지만 생각이 스쳤다. 채용비리를 공공기관의 대표적인 적폐청산으로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이때에 인터뷰로 채용비리로 채용된 자의 채용 취소는 부당해고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지나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공정한 대한민국을 공약한 문재인 정부라서 했던 것일 게다.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인데, 공정한 세상이라면 채용비리는 근절돼야 할 것이고, 채용비리로 채용된 자는 그에 따른 조치를 당하고 채용비리로 인해 채용되지 못한 자는 구제돼야 마땅하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부정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고 부정의의 부정으로, 즉 부정의를 부정함으로써 정의는 바로 세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부정의를 부정하지 않는 세상은 정의의 세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의가 바로 선 공정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며, 마땅히 부정의로 채용된 자는 채용 취소돼야 한다고, 그것이 노동법이 선언한 정의라고는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해고된 노동자를 대리하는 노동변호사로서 할 말을 대답했다.

3. 이 세상에서 노동자에게 자본은 사용자로서 주인이다. 천부의 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근로계약 체결을 통해 사용자 자본에 복종하는 근로자가 된다. 이 근로계약의 세상은 공정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다. 자본의 원리가 지배한다. 이런 자본의 세상에서 공정은 국가 권력이 지배하는 부분에서 말해진다. 국가 부분과 직·간접적으로 국가가 관여하는 공공부분인 공공기관·공기업 등에서 공정이 말해질 뿐이다. 이 세상에서 본래 공정 운운하는 기본권은 국가에 대한 것으로 선언해 왔던 것이다. 오늘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이 나라에서 채용비리로 우리 청년들이 아무리 분노할지라도, 그것은 국가 공공기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의 계승자라고 자청해 온 문재인 대통령조차 오늘 공공기관의 채용비리를 적폐청산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채용비리로 발표된 공공기관 사례들은 일반 사기업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초 채용계획과 달리 채용 후보자의 추천배수를 변경해 특정인 채용”을 해도(한국수출입은행), “채용 공고 후 채용인원을 조정하고 과다한 가점을 부여해 동 병원에 근무경력이 있는 특정인을 채용”해도(강원대병원), “업무관련 자격증이 없는 직원 자녀의 필기시험을 면제해 채용”해도(동남권원자력의학원), “고위인사가 면접위원을 직접 선정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특정인을 특혜채용”해도(세종학당재단), “특정인을 채용하기 위해 당초 공고와 다른 기준으로 변경해 채용”해도(경제인문사회연구원), 국가 공공기관이라면 공정을 이유로 채용비리로 적발해서 수사의뢰하고 향후 채용 취소하고 탈락자를 구제하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는 전체 채용자의 약 90%에 해당하는 일반 사기업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당 기업의 행위로 한 것인 한 특혜채용도 채용비리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공정의 원리는 이런 것이다. 공정의 원리를 침해했다는 분노도 국가 공공기관에 그친다. 일반 사기업의 사용자 자본의 담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해당 기업의 행위로서 한 것이 아닌 경우에만, 즉 사용자 자본에 대한 충실 의무를 저버리고 한 채용업무에서의 직원 개인 비리인 경우에만 배신행위로 문제 삼을 뿐이다. 사용자 자본의 사기업에서 공정한 채용을 하도록 강제하는 법은 없다. 이 세상의 정의는,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면 사용자 자본의 담장 밖에서만 떠들어 댈 수 있다. 오늘 이 나라에서 채용에서 “빽·연줄이 최고 스펙”이었다는 비난은 공공기관 채용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90%에 해당하는 채용에 대해서는 “빽·연줄이 최고 스펙”으로 채용해도 채용비리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서였다. 공정의 말에 내가 갑자기 의아했던 것은. 공정을 꺼낼 수 없는, 자본의 세상에 살아가다가 느닷없이 듣는 말이어서였다.

4. 정부의 채용비리 대책 소식을 나는 이렇게 거창하게 읽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읽고 나면 그만인가. 채용비리를 두고서 오늘 우리 노동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녀 우선채용 등 특혜를 달라고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하고 투쟁하는 것이 노조·노동의 일이라고 여기며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업장에서 채용이 공정을 위해 나아가도록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 노동운동이 외쳐온 세상에서는 공정이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서도 작동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오늘은 채용절차에 관한 협약안을 마련해서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할 일이다. ‘빽·연줄이 최고 스펙’인 세상은 노동자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김기덕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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