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승수 변호사(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영화 <1987>이 화제를 끌고 있다. 영화는 1987년 6월에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이후 역사는 참 씁쓸했다. 민주항쟁의 결과로 개헌이 이뤄졌지만 정치권끼리 밀실개헌에 그쳤다. 대통령직선제 도입은 이뤄졌지만 그것뿐이었다. 민주주의 기본인 선거제도는 건드리지 못했고, 법관이 독점하는 사법권력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2016년 가을부터 촛불이 일어났다. 세계 많은 나라 시민혁명이 그랬고 4·19 혁명과 87년 6월 항쟁이 그랬듯이 시민혁명은 헌법 개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의 기본 틀을 정하는 헌법을 손보지 않으면 낡은 시스템이 가진 문제점을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년 동안 운영된 국회 개헌특위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났다. 개헌특위 위원장은 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이 맡고 있었다. 국회 개헌특위는 지난해 국민참여 개헌을 하겠다며 정부 예비비 51억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하지만 형식적인 지역순회 토론회만 했을 뿐 실질적인 국민 참여는 시도하지도 못했다. 헛돈만 쓴 것이다.

시민혁명, 개헌으로 이어져야 완성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자유한국당이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대선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했던 공약을 파기한 것이다. 최근 들어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자 ‘문재인 개헌’에 반대하고 ‘국민개헌’을 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국민참여 개헌을 하겠다면서 정부 예산을 타낸 뒤 ‘먹튀’를 한 당사자가 이제 와서 국민개헌을 하겠다고 한다. 지난해 하기로 돼 있던 개헌 관련 국민 원탁토론을 반대해서 무산시킨 자유한국당이 이제 와서 ‘국민참여’를 입에 담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이라도 나서 개헌논의에 불을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개헌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하지 못하는 ‘불능국가’가 돼 버린다. 마침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국회가 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헌을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올해 6월13일 치러질 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발언 중에서 상당히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 “개헌의 쟁점인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가 안 되면, 그 부분은 빼고 기본권 강화와 지방분권 개헌이라도 하자”는 취지의 발언이 그것이다.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한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이런 발언은 자유한국당에게 개헌 추진을 방해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번 개헌을 권력구조를 빼고 할 수는 없다. 자유한국당뿐만 아니라 국민의당·바른정당도 권력구조를 뺀 개헌은 불가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으려면 권력구조를 빼고 갈 수 없다. 대통령은 권력구조와 관련해 야당들과 협상도 하고, 국민 사이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권력구조만 다뤄서는 안 된다. 정당득표율을 그대로 국회 의석으로 반영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차례 의지를 표명한 바 있고, “선거제도 개혁만 된다면 권력구조는 양보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개헌을 성사시키려면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개혁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협상해야 한다. 두 가지가 맞물린 문제라는 것은 국회가 지난해 말 개헌특위와 정치개혁특위를 합쳐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논의가 정치권끼리 밀실타협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국민과 함께 공개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

기본권 강화와 선거제도 개혁 분리할 수 없어

사실 노동운동이 요구하는 노동존중 헌법도 선거제도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얘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제헌헌법에 노동자들의 이익균점권(사기업 노동자들도 기업 이윤을 배분받을 수 있는 권리)을 명시한 조항이 있었지만, 관련 입법이 뒷받침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조항으로 존재하다 사라졌던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은 헌법에 한 줄 넣는 것만으로 노동존중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나라 사례를 봐도 그렇다. 세계 여러 나라 헌법 조항들을 모방해 만든 ‘모자이크 헌법’으로 알려진 인도 헌법에는 노동자 경영참여 조항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 노동자들의 삶은 좋지 못하다. 그래서 냉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기본권 조항을 만들어도 정치를 통해 그것을 구체적인 법률과 정책으로 만들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오히려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고, 노동시간이 짧으며,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비교적 보장되는 곳은 모두 정당득표율대로 국회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를 제대로 도입한 국가들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보다 나은 사회로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기본권 조항보다 선거제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핀란드·오스트리아 등은 아예 헌법에서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로 하도록 명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도 이번에 헌법을 개정한다면, 권력구조와 함께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성의 원칙’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권력구조에 관한 논의도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대통령 4년 중임제냐 이원정부제(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총리-국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권력구조를 폭넓게 이해하면,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도 권력구조 개편이다. 국민소환·국민발안·국민투표 같은 제도를 도입해 국민이 직접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회의원을 임기 중에 해임할 수 있게 하는 국민소환제도는 이미 시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높다. 헌법 개정안이나 법률 제·개정안을 시민들이 직접 서명해 제안할 수 있는 국민발안제도가 도입되면, 그것을 활용해 필요한 입법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국회의원들을 통하지 않고도 주권자들이 직접 입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일정 숫자의 서명을 받아 요구하면 특정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국민투표제도도 중요하다.

시민들에게 권력 돌려주는 게 권력구조 개편

뿐만 아니다. 지금 국민참여재판을 하고 있지만 시민배심원들이 내린 판단은 법관을 구속하는 효력이 없다. 실제로 시민배심원들이 ‘업무방해’ 같은 사안에 무죄판단을 내렸는데도 법관이 유죄선고를 한 사례도 있다. 이렇게 국민참여재판 실효성이 약한 이유는 헌법에서 재판은 법관만 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헌법을 개정해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근거를 만들면 시민배심원들의 판단이 법관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제도를 갖추는 것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바람이 실현되는 길이다.

지방분권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논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국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대적인 지방분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분권이 지방자치단체장 권한만 강화시키는 관(官)-관(官) 분권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방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도 필요하고 지방자치에서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은 이런 논의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대한민국을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바꾸고자 하는 세력이라면, 쉬운 길로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사회운동이 각자 자기의 직접적인 요구사항을 개헌에 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각자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모두를 위해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개헌을 하자. 선거제도 개혁과 직접민주주의 확대, 지방자치 민주성 확보와 함께 가는 지방분권, 그리고 권한이 적절하게 배분되고 통제되는 권력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이 가능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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