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취재기자 출신인 미국의 한 언론학자가 수십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미식축구 결승전(슈퍼볼)을 취재하는 기자가 2천명인 데 반해 미 의회 취재기자는 500여명에 불과하다”며 저널리즘의 위기를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7일 2면 톱기사로 <방송팀 2천400명, 호텔 통째 사용 … NBC ‘평창 작전’>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올림픽 주관방송사인 NBC가 취재와 제작에 2천400명이나 동원해 평창의 이곳저곳 경기장 요지를 입도선매했다는 뉴스였다. 조선일보는 미국 NBC가 평창에 있는 올림픽 국제방송센터(IBC) 건물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해 사실상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NBC의 취재와 제작인력 2천400명은 평창에 올 전 세계 방송인력의 30%에 육박하고, 강릉과 용평타워콘도 등 목 좋은 생방송 스튜디오도 독점했고, 방 1개에 1박 80만원 하는 강릉 씨마크호텔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장문(長文)의 조선일보 기사를 다 읽고 나서 든 느낌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였다. 88서울올림픽에 이어 30년 만에 치러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여러 언론이 이런저런 뉴스를 쏟아 냈다. 영국 가디언은 2년 전 “대한민국 정부가 단 며칠간 진행될 경기에 사용할 슬로프를 짓기 위해 500년 동안 보존된 신성한 산림을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환경보호와 맞바꾼 평창 동계올림픽”이라고 비판했다. 이보다 앞서 한국일보도 <평창 동계올림픽, 위신 깎지 않으려고 자연 깎나?>라고 이 사실을 보도했다.

대회가 다가오자 올림픽 취재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언론의 이미지 전쟁이 시작됐다. 예를 들어 노컷뉴스가 지난 7월 <평창 모텔 1박에 87만원 … “한탕주의” 분통>이라며 업자들의 한탕주의를 비판하자, SBS는 지난달 10일 <평창 숙박업소들, 바가지 방값 내림세>라고 맞대응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전쟁을 시작했다.

군사정권이 군림했던 30년 전 서울올림픽 때도 방송은 대부분 정부의 나팔수였지만 신문은 그래도 ‘올림픽 철거민’과 ‘선수 이동경로의 집 도색’ 같은 뻔한 전시행정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심심치 않게 썼다.

밑도 끝도 없이 NBC가 방송인력 2천400명을 평창에 보낸다는 걸 면 톱기사으로 올린 조선일보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새해 벽두부터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논의를 며칠 동안 천하의 특종인 양 대서특필하는 조선일보의 속내도 궁금하다. 1월2일자 1면 머리기사로 실린 <헌법도 좌향좌 … ‘비정규직 폐지’까지 넣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압권은 두 번째 단락에 나오는 “본지가 이날 단독 입수한 자문위의 개헌안”이란 표현이다.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가 만든 헌법 개정 권고초안은 지난해 국회 논의과정에 수시로 보고됐고 11월 말부터 쟁점별 토론과정도 거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내용이었다.

더 황당한 건 조선일보 보도를 대하는 야당들의 태도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충격을 넘어 머리에 징을 맞은 느낌이 든다”고 했고, 이행자 국민의당 대변인은 “참으로 우려스럽다”고 했다. 매일 국회로 출근하는 정치인들이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걸 조선일보가 대서특필할 때까지 몰랐다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3일 1면에도 <병역 거부 허용, 헌법에 못 박겠다니…>라는 제목으로 혼자만 인정하는 특종 행진을 이어 갔다. 한국경제신문은 1월4일자 수석논설위원 칼럼으로 <헌법에서 경제민주화 조항부터 들어내야>라고 기업주들의 이익만 충실히 대변하면서 여론몰이에 들어갔다.

조선일보가 여론몰이를 시작하면 국민이 ‘그래 니들 말이 맞다’며 과거처럼 멍청하게 따라올 줄 안다면 큰 착각이다. 조선일보의 의제 설정력은 더불어민주당 정부의 진짜 멍청한 몇몇 인사에게만 먹힐 뿐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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