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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1987’
   
▲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지난 일요일, 2017년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 밤에 나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동네 영화관에서였다. 이젠 서른 살도 더 먹어 버린 오래된 기억이 상영되고 있었다. <1987>이 펼쳐 놓은 그날이 느닷없이 젊었던 시절을 아프게 불러냈다. 무뎌진 가슴을 때렸다. 학교에서 거리로, 그리고 마침내 광장에서 외쳤던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1987년이었다. 지겹도록 계속됐던 전투경찰과의 교문 앞 전투가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을 계기로 거리로 진출해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마침내 1987년 6월을 민주화운동의 달로 새겨 놓았다. 한 세대를 지나왔건만 그날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만장이 서울광장에 펄럭이고 있다. 지난해 겨울 광화문광장에 피어올랐던 수백 만개 촛불과 겹쳐지고 함께 펄럭인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옛날을 떠올린다더니, 대단한 영웅담도 없이 기껏해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날 수밖에 없거늘 그런데도 그날을 떠올리니 심장은 타성에서 깨어나 마구 방망이질한다. 30년이 지나도 ‘1987’은 그런 날이다. 젊은 피가 뜨겁게 솟구치는 청춘의 연대기인 것이다.

2. 그런데 내 기억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 1987년 6월 이후에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떠올라야 하는데 그건 <1987>에는 없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외침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항복 선언이라고 승리를 노래하더니 1987년 말 직선제 대통령선거운동으로 끝이 나 버렸다. 대동단결의 ‘비판적 지지’가 어지럽게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에게 달려가더니 거리의 시민을 투표소로 향하도록 독려하고 우리의 ‘1987’은 노태우의 당선과 함께 끝이 나 버렸다. 노동자의 투쟁이 거대하게 폭발하던 때였다. 민주화운동의 주력 ‘청년학생’은 거리에서 시민들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대중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위대한’ 민주화운동이 이기적인 계급적 운동을 지지하면 위대해질 수가 없어서였나, 아니면 민주의 적들이 호시탐탐 반동의 계기를 노리고 있어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소심한 전술적 선택을 해서였던가. 그것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그날 6월 민주화운동의 조직대오는 7·8·9월 노동자대투쟁과 조직적으로, 대중적으로 결합하지 않았다. 물론 성명서 등으로 지지를 선언하고 일부는 현장‘투신’해 투쟁에 함께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주화운동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래도 두 투쟁은 위대하게 결합하지 못했다. 연장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6월 민주화운동의 불길은 1987년 말 대통령선거와 함께 꺼져 버렸다고 민주화운동사에 기록되고,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스스로 타오르다 권력과 자본의 탄압에 사그라져 버렸다고 노동운동사에 기록돼야 할 것이다. 그래서 ‘1987’은 노동자대투쟁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거리를 헤매던 우리는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이 없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3. 2016년 말 촛불집회는 민주노총 등이 주도해 온 ‘민중총궐기’ 집회로부터 계속돼 온 거리의 투쟁이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마침내 거대하게 폭발한 것이다. 이 나라에서 다시 타오른 시민항쟁은 30년 전과는 달랐다. ‘청년학생’의 조직대오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노동자단체는 주요 주최단체로 참여했다. 서른 살을 더 먹은 ‘늙은 청년학생’들은 낡은 민주동문회 깃발 아래 <이게 나라냐>를 따라 노래했다. 물론 젊은 ‘청년학생’의 대오도 자신의 깃발을 들고 참여했다. 그러나 촛불시민혁명이라 불리는 촛불집회를 주도했다고는 말할 순 없었다. 그러니 촛불혁명은 ‘1987’의 재현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이건 1987년 민주화운동처럼은 돼서는 안 된다는 다짐의 말이기도 하다. 대통령선거로 마감돼 버리는 시민운동이어서는 안 된다고, 이번에는 촛불대선을 지나서 계속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간절히 부여잡고 싶기에 30년을 지나온 운동의 역사에 기대어 말하고 싶다.

4. 영화 <1987>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사에는 위대하게 기록됐다. 그것은 독재권력의 폭압을 뚫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투쟁의 함성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직선제 등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공장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외쳤던 구호는 임금 및 상여금 인상, 노동시간단축, 조장 등 관리자의 자의적인 평가 폐지, 사무직과의 지위구분 철폐, 식사의 질 개선, 복장과 머리길이 규제 철폐, 강제적인 아침체조 중단 등이었다. 그건 노예 같은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임금과 인간적인 대우, 민주적인 노사관계에 관한 것이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였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3천34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대부분 투쟁은 파업과 시위의 형태로 전개됐다. 노동쟁의는 1963년 이후부터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발생한 전체 노동쟁의를 넘어섰다(한국노동연구원, 분기별 노동동향분석, 2000). 당시 법·제도는 파업을 불법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업은 쟁의행위를 제한하고 금지하고 있던 법·제도를 무시하고 진행됐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노동자대투쟁 당시의 파업투쟁을 불법으로 규제하던 법·제도는 어떻게 변화됐는가. 이건 지난 30년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의 외침, ‘노조할 자유’에 우리 노동운동이 어떻게 응답했던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5. 1980년 헌법과 1986년 개정 노동쟁의조정법의 법 체제 아래서 노동자대투쟁은 전개됐다. 노동자대투쟁 직후 위 헌법은 1987년 헌법으로 개정됐다. 1987년 10월 노동쟁의조정법 개정이 있었고,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7년 3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제정이 있었으며, 다시 약 10년이 지난 2006년 12월 노조법 개정이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2010년 1월 노조법 개정을 통해 전임자급여 지급금지가 시행되고 근로시간면제 제도를 도입했고, 기업단위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는 전임자 등의 노조활동과 노조의 단체교섭을 제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쟁의행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기본권 행사에 관한 법률의 제·개정은 노동자·노동운동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노사관계 민주화·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노사정위원회 등 이른바 사회적 합의기구를 앞세워 노동법의 민주화·선진화를 외면한 입법을 추진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1996~1997년 ‘노개투’와 마찬가지로 2006년 노사관계 선진화방안 저지투쟁을 했으나 노동기본권 행사 보장을 위한 입법을 쟁취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의 단체행동권 등 노동기본권 행사를 제한하고 금지했던 법률상 규제가 그 본질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존속하게 됐다. 제·개정될 때마다 오히려 규제 대상이 많아졌고 규제 강도는 높아졌다. 노동자대투쟁 당시의 노동쟁의조정법과 현행 노조법의 쟁의행위 규제조항들을 단순히 비교해도 바로 알 수 있다. 노동법의 역사가 단결금지법리의 폐지, 민형사 면책의 역사였던 세계사와는 전혀 달리 한국사는 쓰였다. 우리의 경우 단순한 노무제공의 거부인 파업이 범죄행위로 처벌되고 불법행위로 평가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주체·목적·절차·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제한하고 금지해서 쟁의를 원칙적으로 범죄행위 내지 불법행위로 파악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처벌을 면하고 책임을 면한다. 이렇게 쟁의행위의 정당성 법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일반 노동자가 이럴진대 교원·공무원의 노조할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고, 파업의 자유는 박탈됐다. 즉 1999년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이 제정돼 교원노조의 설립 및 그 단체교섭을 허용했고, 2005년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이 제정돼 일부 공무원의 노조 설립 및 그 단체교섭을 허용했으나, 이는 파업 등 쟁의권을 인정하지 않아 쟁의행위 주체로서 지위를 부정한 것이었다.

6. 이상과 같이 <1987>을 보는 오늘,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서 단결해서 투쟁할 자유, 즉 노조할 자유 내지 파업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제한·금지된 채 여전히 오래된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의 외침을 자신의 요구로 외쳐야 할 지경이다. 문제는 촛불집회와 촛불대선을 거쳐 집권한, 이른바 촛불시민혁명을 계승한다고 말해 온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청산 목록의 첫 장에 두고서 개혁할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이 나라에서 <1987>을 보면서 떨구는 눈물에는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은 없다. 이번 민주노총 임원선거는 사회적 대화의 참여가 주된 쟁점 공약이었다. 만약 이 나라 노동운동이 어떠한 형태든 문재인 정부와 대화에 나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노조할 자유, 파업의 자유를 온전히 우리 노동자의 것으로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나라 노동운동이 노동자대투쟁, 30년 전의 ‘1987’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김기덕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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