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우리는 방송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봤다. 방송사가 출연자 블랙리스트에 동조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PD나 기자들을 한직으로 몰아내고, 세월호 참사 원인을 제대로 밝히기보다는 오보를 내거나 정권 입맛에 맞게 유가족들을 폄훼하는 데 앞장서는 등 KBS·MBC·SBS 같은 방송사들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너무나 쉽게 버렸다. 촛불투쟁으로 정권이 바뀌고, 방송사 파업이 진행되고 나서야 우리는 방송이 제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방송이 ‘제대로 된 언론’으로서 역할만 다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만으로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일까?

방송은 큰 산업이며, 이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5만명은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아나운서나 전체를 지휘하는 PD만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방송을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다수는 정규직이 아니며, 심지어 방송사 소속도 아니다. 직접고용 비정규 노동자, 외주제작사 혹은 협력사에 채용돼 있는 노동자·프리랜서·파견노동자 등 고용형태가 매우 복잡하다. 일부 교양·보도 장르를 제외하면 방송콘텐츠 제작현장의 80~90%는 외부노동자로 이뤄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왜곡된 고용형태가 ‘권리 없는’ 노동자를 양산한다. 그래서 살인적인 72시간 연속노동이 용인되고, 심지어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갑질이 횡행하며, 제작현장에서는 욕설과 폭행도 나타난다. 프리랜서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으며 계약서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임금은 제작사가 주는 만큼 받는 것이고 노동자는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도록 늘 대기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모두 개인 책임이다. PD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중간에 팀이 교체되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생계가 불안정한 강제 휴식에 들어간다. 이 모든 일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임계점에 도달한 것 같다. 열린카톡방인 ‘방송계갑질119’에 올라온 이야기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방송을 제작해 왔던 그 ‘관행’이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벼랑으로 밀어 넣는지를 보여 준다. 고 이한빛 PD는 바로 이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목숨을 끊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다고 했다. 이한빛 PD 죽음 이후 CJ E&M은 사과하며 제작환경을 바꾸겠다고 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고용노동부·문화체육관광부가 함께 방송제작 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를 했고, 노동부는 근로감독과 개선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이제 ‘계약서’도 쓴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계약서는 여전히 갑에게 모든 권한이 있고 을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계약서다. 밤샘촬영·생방송촬영을 없애겠다고 했다. 그러나 빡빡한 촬영일정 때문에 드라마 <화유기>는 방송사고가 났고, 방송 하루 전 스태프가 추락사고를 당했는데도 촬영을 강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번 실태조사만 반복하고 똑같은 대안만 내는 현실에 지쳐 ‘또 그러다 말겠지’ 하고 체념하는 목소리를 내뱉는 이들도 있다. 이 지독한 ‘현장’은 정말 바뀔 수 있는 것일까.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방송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제한 적용을 받지 못하게 만든 특례제도를 없애야 한다. 장시간 노동 관행을 없애야 한다. 간접고용 관행을 없애고 직접고용을 넓혀 나가야 한다. 제작비를 현실화하고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방송스태프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마련한 표준계약서가 실효성 있게 제작현장에 관철돼야 한다. 감독기관들이 제대로 관리·감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했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열정을 갈아 넣는’ 제작현실을 바꾸려면 방송사가 노동자 권리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방송의 사회적 책무는 ‘좋은 언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좋은 사용자’로서 기능할 때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방송스태프들도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제도를 잘 만들어도 노동자가 뭉쳐 있지 않으면, 힘이 없으면 그 제도는 현실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방송의 정상화’를 바라는 지금이 적기다. 더 이상 방송사에서 일하는 이들이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게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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