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회사는 미동도 않고, 파업은 길어지지만 해법은 안 보이고. 사무장이랑 올라가서 한 번 싸워 볼까 싶은데…."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파인텍 노동자 차광호씨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무조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앞으로 말도 꺼내지 말라."

서너 개 화분을 벗 삼아 408일을 하늘집에서 살았다. 생수통에 오줌을 받아 바람막이로 세웠다. 햇빛이 바람막이를 비추면 노란 조명이 굴뚝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체력단련 한답시고 매일 팔굽혀펴기 하던 장소, 바닥 페인트에는 차광호씨의 손도장이 찍혔다. 흰머리가 빠르게 늘어났다. 심장이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땅을 밟으니 어지럼증이 덮쳤다. 머리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가족과 동지들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입을 벌려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파인텍 노동자 차광호씨 이름 뒤에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을 때 일들이다.

408일 하늘집서 지낸 차광호는 반대했다
파인텍 노동자들 2년4개월 만에 다시 하늘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박준호씨가 전체 조합원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데 할 수 있는 투쟁은 다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할 만한 건 다하지 않았나." 그 2명을 제외한 전체조합원은 또 반대했다. 승강이는 몇 주째 이어졌다.

결국 차광호씨가 졌다. 김옥배·조정기씨는 가만히 있는 것으로 결의를 수용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전체 조합원 5명이 준비한 2차 고공농성 투쟁이 시작됐다.

지난 21일 오후 5시25분. "밥 올릴 테니 줄 내려 주세요." 십시일반 음식연대 유희 활동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75미터 상공에서 노란 줄 뭉치가 서서히 내려온다. 이날은 11월12일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시작한 파인텍지회 고공농성 40일째를 맞아 민주노총·금속노조 차원에서 준비한 투쟁문화제가 열렸다. 투쟁현장 지원을 위해 유희씨는 서너 시간 전부터 현장에서 식사준비를 했다. 갓 지은 밥과 국을 꾹꾹 눌러 담아 가방에 넣었다. 현장을 지키던 경찰이 내용물을 쓰윽 훑어보더니 문제 없다는 양 손짓한다. 1분·2분·3분·5분…. 가방은 올라가기 시작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굴뚝 끝에 다다르지 않는다. 농성장을 지키는 조정기 지회 조합원의 하늘로 꺾인 머리도 제자리로 돌아오질 않는다. "국 다 식겠네." 푸념이 나온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1931년 5월29일 평양 을밀대 지붕에 여성노동자가 올랐다.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 2천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서른한 살 여성노동자 강주룡이 몰려든 인파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농성 8시간 만에 강제로 끌려 내려온 그는 옥중에서 76시간 단식투쟁을 계속했다. 자신은 해고됐지만 임금삭감을 저지했다. 같은해 8월13일 옥중에서 얻은 병마와 싸우다 빈민굴에서 숨졌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최초 고공농성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최장기 고공농성 잔인사 갈아 치우는 한국 노동자들
"회사 무반응 보면 이번에도 400일 넘을까 걱정"


이 뒤로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하늘로 올랐을까. 한진중공업 김진숙(309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정명·한규협(363일), 스타케미칼 차광호(408일). 대한민국 노동자는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잔인사를 갈아 치우고 있다.

굴뚝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조정기씨를 비닐 농성장 안으로 잡아끌었다. 승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지 묻는 질문에 무거운 답변이 돌아왔다. "저희가 올라가기 전에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사태 해결이 안 되면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올라갔고, 남은 이들도 무기한 투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40일인데요, 스타플렉스의 대응을 보면 400일을 넘길 것 같아 걱정됩니다." 파인텍 해고자들은 고공농성 날짜를 408일부터 하루씩 더해 센다.

스타플렉스는 1995년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 영업을 개시했던 옛 한국합섬을 2010년 인수했다. 스타케미칼로 이름을 바꾼 공장은 2011년 4월부터 2013년 1월까지 2년도 채 가동되지 않았다. 회사는 적자를 이유로 폐업을 강행했고 노동자 228명은 희망퇴직에 합의했다. 차광호씨 등 희망퇴직을 거부한 28명은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매각중단과 공장 재가동을 요구했다. 이들의 반발에도 회사 노사는 2014년 5월26일 공장에서 철수했다. 다음날 차광호씨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스타케미칼 공장 내 45미터 굴뚝에 올랐다.

"회사는 많은 돈을 벌었다. 경쟁력 있는 특수섬유를 개발하는 일에 소홀했고, 원사 대량생산에만 매달렸다. 잘나가던 회사는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2007년 한국합섬은 이렇게 폐업했다. 스타케미칼이 회사를 인수했지만 2년 만에 어렵다며 다시 공장 문을 닫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만 일자리를 잃었다." 차광호씨가 농성 중 쓴 일기의 일부다.

그는 2015년 7월8일 스타플렉스에서 고용·노조·단협의 3승계 약속을 받고서야 땅으로 내려왔다. 스타플렉스는 고공농성이 끝날 때까지 싸웠던 해고자 11명에게 2016년 1월부터 충남 아산에 위치한 파인텍에서 일하도록 했다. 이들이 이 회사 전체 직원이었다. 구미를 떠날 수 없었던 해고자 3명은 파인텍 행을 포기했다. 방수포에 쓰이는 타폴린을 생산하는 파인텍의 시급은 최저임금+1천원, 연장근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수령액은 월 130만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숙소는 움막과 다름없었다. 약속과 달리 단협 체결이 이뤄지지 않자 분회는 지난해 10월28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무노동 무임금. 파업이 길어지자 동료 3명이 올해 상반기 차례로 다른 일터를 찾아갔다. 남은 조합원은 이제 다섯. 홍기탁·박준호씨가 '고공농성'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시기가 이 즈음이다.

이날 민주노총이 주최한 투쟁문화제에 노동자 300여명이 모였다. 농성 시작 후 가장 많은 인파다. 파인텍이 있는 충남지역 노동자를 주축으로 경기지역 금속노동자, 수도권 건설노동자들이 발전소 밖 도로에 앉았다.

누군가 하늘을 보고 외쳤다 "노동자가 별이 됐다"

75미터 하늘에 휴대폰 불빛 2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노동자가 별이 됐다"고 외쳤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에서 스타플렉스 본사는 직선거리로 1.6킬로미터. 굴뚝 위 홍기탁·박준호씨는 그 회사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박준호씨가 전화를 걸어 왔다. "5명이서 할 수 있는 투쟁의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동지들의 연대만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위에서 잘 견디고 버텨 내겠습니다. 투쟁의 결의 변치 않고, 조급히 생각하지도 않겠습니다." 위에서 오래오래 견뎌 보겠다는 다짐을 쏟아 냈다.

홍기탁씨가 넘겨받았다. "정리해고, 손배·가압류, 노조할 권리 제약, 비정규직 확산 문제는 협상으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려야 합니다. 노동악법을 철폐하는 투쟁에 민주노총이 나서야 합니다." 자기 걱정은 않고 딴 소리만 늘어놓는다.

투쟁하는 사람 마음은 투쟁하는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했다. 마음을 털어놓기도 쉬웠던 모양이다. 지난 20일 이상목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장이 농성장을 찾아 차광호씨에게 물었다. 왜 다시 고공농성이냐고. "조합원이 20명·30명만 있어도 하늘에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5명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기씨가 거들었다. "사람이 있었으면 계속 집회라도 하고, 막말로 사장 집에 찾아가서 시끄럽게 농성이라도 할 수 있을 건데요. 우리들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 농성장으로 돌아온 이상목 지회장은 조합원들에게 파인텍 이야기를 풀었다. 동지들이 있으니 싸울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21일 오전 농성장에서 만난 하이디스지회 조합원 최지은씨는 "지회장이 한 말은 이미 우리가 체화하고 있는 것들"이라며 웃었다.

하이디스 해고노동자들 "포기하면 지는 것"
대통령 면담 요구하며 청와대 앞 노숙농성


하이디스 해고노동자들이 청와대 인근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 것은 지난달 2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태를 해결해 달라며 면담을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지회와 가진 면담에서 "하이디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이디스 모회사인 대만 이잉크(E-ink)는 지회 조합원들을 두 차례에 걸쳐 정리해고했다. 생산부문을 없애고 광시야각 원천기술 특허권 장사에 집중하면서 2015년 253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다. 희망퇴직 거부자 중 79명을 같은해 3월31일 정리해고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하이디스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25일로 1천일을 맞았다. 축하하기 어려운 기념일이다. 하이디스는 지난해 1월에는 시설관리 업무를 외주화하고 해당 노동자 15명을 정리해고했다.

정리해고에 반발하는 노동자 73명이 이잉크에 고용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21명이 돌아가며 하루 종일 농성장을 지킨다. 절반 이상(12명)이 여성노동자들이다. 낮 동안은 국회·청와대·대만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와 선전전을 한다.

한 사람 인생으로 한 편의 서사시를 쓸 수 있다고 했었나. 결혼보다 투쟁을 선택하는 조합원, 동지가 아니라면 말하지 못할 갖가지 사연들을 공유하며 1천일을 소설같이 보냈다. 최지은씨는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승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기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투쟁을 중단하면 지는 거고, 싸우고 있으면 이기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싸우고 있으니 이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지난 6월 수원지법 민사13부(부장판사 김동빈)는 하이디스 해고노동자 58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회사가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서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최근 법원은 지회와 하이디스를 불러 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지회는 하이디스에서와 유사한 업무를 할 수 있는 현장으로 고용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는 보상이나 사회적기업 설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간격이 크다.

김홍일 지회 사무장이 농성장에 들어오다 낯선 사람을 보고 주춤거린다. 담벼락에 걸쳐 놓은 비닐 천막에 몸이 살짝 닿자 쌓여 있던 눈 더미가 흘러 내렸다. 이길 수 있겠냐고 물었다. "외자유치 먹튀자본이 기술은 빼먹고 노동자는 해고하는 상식적으로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서 시작된 싸움입니다. 외국자본 투자유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회에 알린 것만으로도 무시하지 못할 성과를 이미 냈지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투쟁해 얻은 결과라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승리하는 겁니다."

택시노동자 110일, 콜트콜텍 4천일 눈앞

콜트콜텍·하이텍알씨디코리아·쌍용자동차·아사히글라스·현대라이프생명·KTX 승무원을 비롯해 불법파견·정리해고·손해배상 문제로 새해에도 농성을 계속해야 하는 사업장이 민주노총에만 80여곳에 이른다. 한국노총도 KPX케미칼·KEB하나은행·썬코어·버치힐서비스·부곡하와이·전주페이퍼 전주공장 등 사용자 부당노동행위와 구조조정으로 노사갈등이 불거진 사업장이 적지 않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내년 1월12일이면 투쟁 4천일이 된다. 전주시에 법인택시 전액관리제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시작한 김재주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장의 고공농성은 22일 현재 110일째가 된다. 고용노동부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아사히글라스 비정규 노동자들은 구미공장 앞 천막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 51명은 공장점거에 따른 회사의 손해배상 요구로 앞으로 3년간 30억원을 물어 줘야 할 상황에 처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3명은 회사 대주주 마힌드라그룹 회장을 만나 복직 약속 이행을 요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22일 오전.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씨가 자신의 SNS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세요." 댓글이 주르륵 달린다. 쌍용차 해고자 김득중씨가 가장 빨랐다. "오늘도 힘!". 하이디스 해고자 이상목씨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홍기탁·박준호 힘내라."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응원글이 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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