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삼성전자 직업병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랐다. 반올림 회원들이 지난 8월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정기훈 기자

우연의 일치일까. 지난해 12월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뒤 ‘박근혜표 노동정책’이 법원 판결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전지법 민사21부는 올해 1월31일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의 핵심이었던 성과연봉제 확산에 제동을 걸었다. 한국철도공사·한국수자원공사·한국철도시설공단·한국가스기술공사·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노동자들이 각 기관을 상대로 제기한 취업규칙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모두 받아들였다. 노동자 과반수 동의 없이 성과연봉제 도입·확산을 밀어붙인 기관이었다.

법원은 “취업규칙 적용시점이 늦춰지는 동안 헌법상 노조에 보장된 단체교섭권이 충분히 발현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5개월 뒤 정부의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권고안 폐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박근혜 정부 노동관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은 2013년 철도노조 파업이었다. 정부는 수서발 KTX 민영화에 반발한 철도노조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해 12월22일 노조 지도부가 피신한 민주노총 건물에 대규모 경찰력이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올해 2월 대법원은 불법파업에 따른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파업 당시 노조 지도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소수노조 배려, 악질 사용자에게 철퇴

우리나라 사회 전반의 화두는 ‘적폐청산’이었다. 오랜 기간 쌓인 노동현장 적폐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이명박 정부 노동적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다. 올해 들어 법원은 교섭창구 단일화로 피해를 입은 소수노조를 배려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소수노조에 사무실을 제공하지 않은 대림자동차 사용자 행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서 규정한 공정대표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상당한 물리적·비용적 부담이 따른다거나 교섭대표노조와 비교해 조합원이 적다는 사정만으로 교섭대표노조에만 노조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서울고법은 올해 10월 소수노조에 단체협약 잠정합의안 찬반투표권을 주지 않은 경남제약노조를 비롯한 3개 노조에 “금속노조에 각 500만원씩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창원지법은 1월 금속노조 삼성테크윈지회가 사용자를 상대로 낸 교섭요구 사실공고 이행 가처분신청 판결에서 기업별노조의 교섭대표노조 유지기간을 “임금협약 효력이 발생한 날을 기준으로 2년이 되는 날”로 제한했다.

올해 2월17일 대전지법 천안지원 1호 법정. 노조탄압 대명사 유성기업의 유시영 회장이 부당노동행위로 법정구속되자 환호성과 박수가 나왔다. 재판부는 “피고의 범행은 헌법에서 보장한 근로자 단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며 “게다가 이 사건 범행은 회사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조직적·계획적으로 이뤄졌고 그 기간 또한 장기간으로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22일 유 회장에 대해 징역 1년2개월을 확정했다.

올해 법원이 ‘악질 사용자’들에게 잇따라 철퇴를 내리면서 막혔던 노동자들의 가슴은 조금이나마 뚫렸다. 10월에는 해고한 비정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기로 사회적 합의를 한 뒤 복직 노동자들에게 일도 임금도 주지 않고 있다가 야반도주한 최동열 전 기륭전자 회장이 법정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이 1월 노조 지부장을 집단적으로 괴롭힌 것과 관련해 인천성모병원 병원장을 포함한 병원 임원들에게 손해배상을 판결한 것도 눈에 띈다.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전해진 낭보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유족들에게 낭보가 적지 않았다.

서울고법은 올해 5월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반도체 사업부에서 일하다가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항소를 포기했다. 8월에는 대법원이 삼성전자 기흥공장 LCD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도 산재로 인정했다.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이 반도체·LCD공장 업무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지난달에는 삼성전자 온양사업장 반도체라인에서 일하다 뇌종양으로 숨진 고 이윤정(사망 당시 29세)씨 산재를 인정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뇌종양은 반도체·LCD공장에서 백혈병 다음으로 많이 제보되는 직업병이다. 그럼에도 대법원에서 산재를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올해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판결이 유독 많았다. 서울고법이 11월 정상어학원에게 프리랜서 강사 퇴직금·연차수당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을 포함해 웨딩플래너·객원 방송PD·헬스트레이너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았다.

특수고용직 노동자성 인정 잇따라
2천400원 안 냈다고 해고인정 ‘최악 판결’


주요 대기업 불법파견 판결도 이어졌다. 서울고법은 2월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646명이 원청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파견 대상은 컨베이어를 타지 않는 포장·출고업무까지 확대됐다.

9월에는 대형마트인 세이브존 용역업체 계산원들이 원청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반면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패소했다.

통상임금 소송 판결도 잇따른 가운데 기아차와 현대모비스 노동자들의 승소가 주목받았다. 기업에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있으면 통상임금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는 신의칙 성립 여부가 쟁점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8월(기아차)과 11월(현대모비스) 재판에서 사측의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연장·야간·휴일근로로 생산한 부분의 이득은 이미 회사가 향유했고, 가정적인 결과를 미리 예측해 근기법에서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이달 13일 아파트 경비노동자 휴게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한 판결도 의미가 컸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휴게시간을 늘리면서도 실질적으로 휴식을 보장하지 않거나 휴게실을 제공하지 않는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노동자들에게 기쁜 소식만 날아든 것은 아니다. 2010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서 파업한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4명에게 20억원을 배상하라고 한 8월 부산고법 판결, 승차요금 2천400원을 회사에 내지 않은 버스기사 해고를 인정한 1월 대법원 판결은 민변이 선정한 올해의 ‘걸림돌 판결’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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