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교사인 나는 젊은 시절 교육운동에 뛰어드는 바람에 교감·교장이 되는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교감·교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역할을 잘 해내면 학교 교육을 제대로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폭이 넓어져서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잡지 못해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대신 나는 해직 기간 중에 서울시 교육위원을 지낸 바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 당시로는 수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전교조·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하면서 교육현장에서는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지영 영화감독에게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만드는 정지영 감독이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해, 안성기를 비롯한 주연들도 흥행에 성공하면 출연료를 받기로 하고 우정출연했고, 단역들도 정 감독 주변 사람들이 몸으로 때우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해진 날에 지정된 촬영장소로 나갔더니, 교사 출신이라며 나에게 대학 총장 역할을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평교수 역인 안성기가 나에게 와서 진실과 정의를 외치며, 총장의 무소신과 우유부단을 성토하며 호소하는데 총장 역인 나는 뒷짐을 지고 창밖만 내다보는 역할이었습니다. 짧은 대사도 한마디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했습니다. 결국 영화에서는 내 뒤통수만 나오게 됐습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명품 뒤통수 연기라고 은근히 놀렸지만, 나는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뒤통수뿐이었지만 그래도 대학 총장이었으니까요. 거기다 그걸 계기로 대배우인 안성기도 덤으로 알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부러진 화살>의 성공으로 정 감독은 정말 만들어 보고 싶었던 영화를 자비로 만들었는데, 김근태 고문사건을 다룬 <남영동 1985>였습니다. 그때가 2012년이었는데 이명박 정권 말기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혈안이 돼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치던 때였으니,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정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정권교체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탠다며 촬영을 서둘렀습니다. 어느 날 국무회의 장면을 찍는다면서 장관 역할을 맡아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양복을 차려입고 촬영장으로 갔지요. 카메오 출연으로 재미도 보탤 겸 현직 관료나 정치인 등 많은 분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촬영 준비를 끝낸 정 감독이 국무위원 배역을 발표했습니다. 모두 자기는 무슨 장관이 되나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분위기였지요. 정 감독이 나를 지목하면서 선생님은 교육계이기도 하고 전번에 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니, 이번에는 교육부총리가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염치·체면도 없이 얼른 수락했지요. 그래서 나는 졸지에 교육부총리가 된 것입니다. 자리도 대통령·국무총리 옆이었습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됐고 나는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국무위원들의 얘기를 경청하며 묵묵히 앉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대사가 없었으니까요. 여러 번 “레디~ 고”와 “컷”을 외치며 긴 시간 촬영은 진행됐고, 드디어 정 감독의 최종 “오케이”가 떨어지며 국무회의는 끝났지요. 그리고 몇 달 뒤 어렵게 영화가 완성돼 특별시사회가 열렸습니다. 출연자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초청됐지요. 나도 기대를 안고 참석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나왔을까. 저번처럼 뒤통수만 나오는 건 아니겠지 하며 같이 출연했던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국무회의 장면이 나왔습니다. 상당히 오래 찍었는데도 회의 장면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경을 쓰면서 봤는데도 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 편집을 하면서 잘라 버린 것이었지요. 은근히 기대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다른 사람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나도 출연했으니 나올 거라고 말했던 것이 창피하기도 했지요. 결국 나의 교육부총리 시절은 이렇게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나는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진짜 내가 교육부총리가 됐으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했을까. 영화처럼 화면에는 나오지 않더라도, 많은 것보다는 뭔가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그것은 전교조의 ‘노조 아님’ 행정조치를 철회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추운 겨울날 전교조 간부들이 단식을 하고 있고, 선생님들은 연가투쟁을 한다고 합니다. 국민도 여론조사에서 57%나 전교조 편에 서고 있습니다. 김상곤 교육부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은 가장 먼저 전교조를 노조로 인정하고, 전교조와 함께 교육혁명의 첫발을 내디뎠으면 좋겠습니다. 그 길이 촛불혁명 정부가 가야 할 노동존중 교육중시의 길입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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