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이사한 이후 청소를 자주 한다. 청소를 시작하니 집에서 더러운 것만 보인다. 먹고 난 그릇과 쌓인 빨랫감.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그릇을 말리고, 빨래를 넌다. 마른 그릇을 정리하고, 빨래를 갠다. 내일 아침을 위해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인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운다. 먼지가 쌓인다. 다시 청소기를 돌린다. 표시도 나지 않는 끝없는 집안일. 심급대리인 소송대리는 한 심급이 마치면 끝나기라도 하지, 진정한 시지프스의 노동은 바로 가사노동이었다.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탄다. 어떤 기사 분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또 어떤 분은 그냥 바라만 본다. 버스노동자. 출근시각 버스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겠지. 노동자들. 학생 같은 이들은 학원이 많은 강남역에서 내린다. 미래의 노동자들. 얼마나 스펙을 쌓아야 이 자본주의 사회에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 사무실 건물에 들어가면 언제나 계시는 경비아저씨. 인사만 받아 주시는 무뚝뚝한 분, 살갑게 말을 건네시는 분. 경비노동자.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본다. 어제까지 가득 찬 내 책상 쓰레기통이 어느새 싹 비워져 있다. 청소노동자. 탕비실에 쌓여 있던 찻잔과 머그컵이 깨끗이 씻어져 있다. 우리 사무실 직원. 역시 노동자들.

일을 시작한다. 전자소송에 들어가서 새롭게 송달된 서면이 있는지 확인하고, 메일함을 열어 본다. 재판 일정을 체크하고, 가장 빨리 오는 기일 서면을 쓰려고 기록을 읽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때로는 같이, 때로는 혼자 밥을 먹는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주신다. 식당노동자. 식사 후에는 커피 한잔 마시러 카페에 간다. 줄이 길지만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빠르게 커피를 만드니 금방 내 차례가 온다. 카페노동자. 야근을 할 때면 가끔 가까운 빵집에 간다. 그 빵집은 다름 아닌 파리바게뜨. 그 전엔 잘 몰랐던 ‘제빵기사’가 떠오른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계산대 뒤 빵 만드는 곳을 눈여겨본다. 하얀 유니폼과 긴 모자를 쓴 그들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빵을 만든다. 제빵노동자.

나의 하루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노동자’다. 보이는 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 노동의 종류는 다르지만 다들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과 TV를 보면 정치인이나 재벌,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만 사는 것 같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불운한 사고가 나야만 비로소 ‘보인다’. 지난해 구의역 김군, 얼마 전 제주의 이민호군이 그렇다.

무엇보다 아직도 헌법에는 근로만 있고, 노동이 없다. 여전히 정규 교육과정에는 경제나 법만 있고, 노동은 없다. 노동은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직후 제일 처음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지만, 공사측은 이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는 불법파견이니 직접고용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파리바게뜨측도 이행을 미루고만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20년 동안 왜곡된 노동구조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그 기간만큼 힘겹다. 싸울 수밖에 없다.

2018년에는 그동안 쌓인 노동의 적폐를 청산하면서, 노동자가 보이고 노동이 불리는 사회를 만드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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