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조선일보가 적폐청산 피로도를 목청 높여 외친다. 지난달 16일 조선일보 8면엔 <검찰 수사 받고 있는 이병기 전 국정원장, 이헌수 전 기조실장 모두 자녀 혼사 앞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두 사람 다 박근혜 정부 때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정기 상납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집요하게 검찰수사 흠집내기에 나서더니만, 이번엔 수사대상인 두 사람의 혼사까지 들먹인다.

이병기 전 원장은 장남이 이달 17일 결혼하고 이헌수 전 실장은 딸이 같은달 19일 결혼한단다. 두 사람의 자녀 결혼식과 검찰 수사가 무슨 관련인지 모르겠다.

몇 달 전까지 ‘작은 결혼식’ 시리즈를 온 지면에 도배질하던 게 조선일보다. 잘못된 유교전통과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이종결합해 만들어진 병폐 중의 병폐가 한국 결혼문화다. 강남에서 올리는 이 전 실장 딸 결혼식과 이 전 원장 장남 결혼식이 조선일보식 ‘작은 결혼식’이라도 되나.

외국친구들에게 ‘결혼식장’이란 말을 설명할 때마다 난감하다. 결혼식만을 해 주는 별도 업종이 있는 것도 우습다. 혼사는 혼사고 수사는 수사다. 인과관계 없는 둘을 억지로 묶어야 할 만큼 조선일보는 간절했던가 보다.

제주도의 특성화고 현장실습 고교생 사망에 온 국민이 슬퍼하고, 뜻있는 이들이 교육부와 학교에 취업률 줄세우기 중단을 요구하는데 조선일보는 특성화고 졸업생 취업률이 올랐다는 기사를 지면에 버젓이 박았다(조선일보 11월21일 14면 '특성화고 졸업생 2명 중 1명 취업 성공').

조선일보는 “직업계고 졸업생의 취업률이 50%를 넘어선 것은 2000년(51.4%) 이후 17년 만이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보기엔 17년 만의 경사라도, 학생들에겐 취업 우선주의에 매몰된 꼰대들의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부는 조선일보가 물어본다고 “2017년 직업계고 졸업자 취업률이 50.6%로 집계됐다”며 “이는 전년보다 3.4%포인트 상승한 것”이라고 답했다. 실습 나간 학생이 죽었는데 취업률 올랐다며 기사 쓰는 기자나, 그렇다고 취업률 숫자를 주워 바치는 교육관료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지난달 한 특성화고 졸업생으로부터 “실습 갔다가 너무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고 알바하는데, 담임이 취업률 떨어지니 4대 보험 되는 곳에 들어가 있어라’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게 교육부가 말하는 취업률의 허상이다.

11월29일자 조선일보 스포츠면(28면)엔 평창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경기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 간판 공격수가 빙판을 지치는 큰 사진이 실렸다. 이 톱기사의 제목은 <“애정 없으면 노동 … 열정 있으니 즐겨요”>였다.

이 톱기사 제목은 조선일보가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여년 전 경찰 조서에서나 본 ‘노동자풍’이란 단어처럼 조선일보에게 노동은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노동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길 수밖에.

인권 수업 때 중학생들에게 ‘노동자’ 하면 떠오르는 생각을 물으면 “불쌍해요”나 “더러워요”가 대부분이다. 누가 노동을 이렇게 만들었나.

아이 손잡고 길 가던 부모가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너도 커서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라고 말하는 만화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노동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바로미터가 이 지경이니,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어디서 감히 겸상을”이라고 호통치며 시험만능주의에 빠져 있질 않는가.

그것도 명색이 언론이란 게 이런 머리를 가졌으니, 나라 꼴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절망스럽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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