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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진수 국장을 추모하며
   
▲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이런 ‘부분’은 말입니다, 이런 ‘부분’으로 정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건설노동자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그는 참 ‘부분’을 즐겨 쓰곤 했다. 마치 운율을 맞추듯. ‘부분’을 곁들여 거리낌 없이 본인의 생각을 펼쳐 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랜만에 꺼내 보는 고 장진수 국장에 대한 기억이다.

벌써 10년.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지난 4일 마석모란공원에 많은 선후배들이 모였다. 경원세기노동조합 선후배, 이후 부천노총을 이끌어 온 식구들, 그리고 가족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까지. 아마 10주년이라는 숫자가 더욱 많은 이들을 불렀을 게다. 게으른 필자도 오랜만에 묘소를 찾았다.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10년 전 그날처럼 날씨도 매섭기 그지없다. 날씨만 봐서는 ‘정신 바짝 차려라’고 훈계하는 듯하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그를 아는 이라면 이견이 없을 것이다. 2006년 3월부터 뵀으니 2년이 안 되게 함께했다. 천안 집에서 서울여의도 한국노총으로, 새벽 일찍 출발했고 막차를 타기 일쑤였다. 때로는 일이 밀리면 여의도 부근에서 쪽잠을 청했다. 그도 아니면 기자실 소파를 의지하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힘들 만도 한데 그는 “일찍 나오면 기차 자리에는 앉을 수는 있겠네요”라는 물음에 빙그레 웃으며 “얼마 안 걸려 자리에 앉지 않지. 손잡이 잡고 운동하면 아주 좋아”라고 받아쳤다.

대단한 에너지였다. 그의 적극성과 건강함은 다방면에서 볼 수 있었다. 2007년 여름 전주 녹두장군배(단 1회에 그친)에 출전한 기억은 모두를 즐겁게 한다. 너무나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특출한 능력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그리고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그의 발 앞에는 늘 공이 없었다. 수돗물 한 바가지로 땀을 식히고 또 달렸다. 실력 차란 늘 있는 법이라며, 딱 1회전을 치르고 난 후 미련 없이 올라왔던 기억이 새롭다.

조합원이 부르는 곳이면 그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도 함께 지원 갑시다.” 전라남도 고흥 건설노동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며 손을 내민 적이 있다. 고흥군청을 곧장 찾아가(쳐들어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고선 밤늦게 광주로 오더니 새벽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한참 어린 필자도 따라가기 어려운 참으로 타고난 건강인이었다. 지금은 한국노총 건설조직은 그때 장진수 국장의 손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계셨다면 건설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은 어땠을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적폐는 남아 있고, 여전히 노동기본권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주영 위원장의 낮은 목소리에서 고인에 대한 죄송함과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10년이 지났는데 참으로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더 못해졌다’고 꾸중한들 뭐라 할 변명도 변변치 않다.

그때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는 명제에 우리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국회에서는 입법도 제안됐고, 노동계에서는 이들을 위한 지원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진정한 의지가 없었다. 법률은 ‘안’에 그쳤고, 노동자들의 단합된 힘도 점점 사그라져 갔다. 이런 안일한 모습에 대한 마땅한 대가였던가. 그리고 그해 찾아온 대선에서 전에 경험하지 못한 정권을 만났다. 그리고 9년. 참으로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서야 겨우 그 시점으로 돌아갔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때가 참으로 적기였다. 그리고 지금도 적기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기 어려운 노동자가 무려 1천만명을 훌쩍 넘는, 10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지만. 지금의 노동환경이라면, 우리 하기에 따라서는 바꿀 수 있다. 이젠 실천이다. 이참에 고 장진수 국장이 남기고 간 리더십을 되새기고 실천해 보면 어떨까.

앞서 짧게 소개한 그의 모습과 본받을 점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가장 인상적인 점은 늘 낮은 곳을 스스로 자처하는 자세라고 말하고 싶다. 전체를 위해서라면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뒷줄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합원 손으로 뽑힌 최초의 위원장이었지만, 부천지역 모든 노동자들의 응원이 있었지만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았던가. 흔히 말하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사무총국 가장 낮은 곳이 늘 그의 차지였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김형동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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