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법·개혁 부서(Labour Law and Reform Unit)에서 주최하는 워크숍 참가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와 있다. ILO는 확산하는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 특히 특수고용 및 간접고용 관계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997~1998년 계약노동(contract labour)에 관한 협약 채택을 위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비록 협약 채택에는 실패했지만, 변화하는 현실에 걸맞게 노동법·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은 계속돼 2006년 ILO 총회에서 '고용관계 권고(제198호)'를 채택했다. 필자는 당시 방문연구자로서 ILO에 머물면서, ILO총회에 참석한 노조 대표자들을 지원하며 198호 권고가 채택되는 현장을 봤다. ‘고용관계 권고’는 ILO 회원국에 법적 구속력을 갖는 협약은 아니지만, 고용계약이 아닌 계약형식으로 노동자를 활용하는 사용자의 전략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현실에 대응해 노동법·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제안을 담고 있다. ILO 사무국은 ‘고용관계 권고’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계속해 왔는데, 이번 워크숍은 비중심부 국가라 할 수 있는 아시아·라틴아메리카·동유럽·아프리카 국가들에서 고용관계를 둘러싼 법·제도적 변화의 최근 상황을 공유하고, 정책적 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됐다.

“고용관계를 정의하고 규율하기”(Defining and Regulating the Employment Relationship)라는 프로젝트 주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이번 워크숍에서는 다양한 계약형태로 확산하는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에서 어떠한 법·제도적 변화 노력을 하는지 소개하고 시사점을 찾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EU 국가들의 고용관계 비교연구로 유명한 카운투어리스(Countouris) 런던대학 교수의 발표였다. 그는 특정한 사용자에 대한 종속성을 기준으로 구축된 고용계약 모델은 더 이상 노동자 보호와 사회적 재분배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으며, “타인을 위한 노동의 개인적 제공”이 새로운 노동법적 기초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의 하나는 영국에서 ‘근로자'와 ‘자영인’ 사이에 ‘노동자'라는 제3의 법적 범주를 만들어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한 시도가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혔는가에 관한 영국 의회 보고서다. 영국은 1996년 고용권법 제정 등 다양한 입법을 통해 종래의 ‘근로자(employee)’ 이외에 ‘노동자(worker)’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고, ‘노동자’에 대해서는 법적 권리의 일부만을 부여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입법 이후 사용자들은 고용계약의 형식적 측면을 변경해 종래 근로자에 속하는 사람들을 ‘노동자’ 범주로 떨어뜨리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고, 이제 ‘근로자’와 ‘노동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법적 분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노조들은 법적 권리를 차별적으로 부여하는 제3의 범주에 비판적이며, 다양한 계약형태의 노동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경험을 접하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정부 이래로 역대 정권들은 비정규 노동자 보호를 말하면서, 근로자와 자영인 사이의 중간 범주인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에 관한 입법을 선호하고, 실제로 2007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특례 규정을 신설했다. 또 불법파견 시비를 비켜 가기 위해 ‘사내하도급’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허용하는 사내하도급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지난 십여년간 우리가 목격한 현실 역시, 이러한 차별적 범주로는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새로운 문제가 양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근로자’와 ‘사용자’ 정의의 확장을 비롯한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우선적 입법 요구로 제기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진정 노동존중 사회에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입법 요구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u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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